건축을 하면서 답사를 많이 다닌다. 답사는 여행이다.

일상에서 잠시 떠나 새로운 환경을 만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답사를 다니면서 이렇게 작은 나라인데 어쩌면 지역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이렇게 다른지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참 다양하고 주어진 환경과 잘 어울리면서 사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주 인근 산골이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그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야산 중턱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 덕에 전망이 좋았다. 마을 넘어 논과 밭, 그리고 멀리 맞은편 산이 훤히 바라다 보였다.

작은 방 두 개 사이에 부엌이 있는 초가집. 그리고 마당 한편에 작은 창고와 변소가 있었다.

담장도 재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어머니 말씀으로는 가끔 마당에서 여우가 밤에 자고 가는 것을 보셨다고 한다.

번잡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내가 하도 방을 자주 들락거려서 동그란 주물 문고리가 닳아서 떨어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겨울에 아랫목은 절절 끓지만 윗목에 둔 물은 꽝꽝 얼어버리는 방이었다. 호롱불이 만들던 일렁이는 그림자, 창호지에 배어 들어오던 아침 햇살, 부엌에 걸려있던 작은 가마솥, 그리고 싸리담장 주위에 피던 봉숭아...... 집 뒷산 양지 바른 곳에 고개 숙이고 있던 할미꽃이 생각나서 나는 요즘도 봄이면 할미꽃을 보러 가까운 식물원에 간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몇날 며칠은 새 신을 들고 맨발로 뛰어 다녔다. 그 고무신은 신다가 찢어지면 어머니께서 희고 굵은 실로 꿰매 주셨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작은 물길을 만들고 뒷산에서 낙엽이 날아와 바람에 구르던 마당.

그 마당에서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얼마 후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어릴 적 고향집에서 나를 안고 계시는 어머니

 

서울에서 여기저기 이사 다니면서 셋방살이를 하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다.

면목동 용마산 기슭. 지금은 폭포공원으로 변신 했지만 그곳은 원래 화강암을 채취하던 석산이었다.

다이나마이트를 폭파해서 돌을 채취하던 그 석산 인근에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다이나마이트를 폭파할 때는 가끔 주먹만 한 돌이 지붕을 뚫고 들어오기도 했다.

주인 없는 땅에 블럭을 대충 쌓고 벽 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루핑이라는 기름종이를 지붕으로 얹었다.

비가 오면 온 방안에 그릇을 놓고 물을 받았다. 블록 벽은 온통 구멍 투성이라 벽에 붙어 누워있으면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보였다.

겨울엔 집 안이나 밖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어머니는 부엌 선반에 과자 몇 봉지를 떼다가 진열해 놓고 장사를 하셨다.

나는 그 비닐 과자봉지 밑에 작은 구멍을 내고 가끔 어머니 몰래 과자를 하나씩 빼 먹었다.

그 동네엔 밤마다 횃불을 밝히고 여기 저기 무허가 집을 지었다. 하루 밤에 몇 채씩 지었다.

 

그 석산 동네를 떠나서 이사 한 곳이 중랑천 인근이다.

당시 중랑천 변에는 판자 집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장마가 지면 둑 아래쪽에 있는 집은 떠내려갔다.

의정부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밀려 내려오던 황토 물엔 부서진 집과 함께 닭이나 돼지도 떠내려 왔다.

비가 그치면 밤에 횃불을 밝히고 또 집을 지었다. 한번은 친구가 자기 책상을 장만했다고 자랑을 했다.

친구들이 몰려서 구경 갔는데 그 책상이라는 것은 사과궤짝을 하나 주워 다가 엎어놓은 거였다. 겨울엔 중랑천에서 다리에 철사를 붙인 썰매를 탔다.

연을 날리기도 하고 보름엔 쥐불놀이를 했다. 다른 동네 아이들과 축구 시합을 하러 몰려 다녔다.

그 시절 같이 놀던 친구들을 아직도 만난다.

오십년 가까운 세월이 순간이동처럼 흘렀다. 우리가 만나면 아직 생생한 그 시절, 그 곳, 그 집 이야기로 만취하게 된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많은 이야기와 추억, 그리고 아직도 잊지 못할 친구들은 그곳 그 시간에 그대로 남아있다.

결혼하면서 그 동네를 떠나 하계동에 작은 아파트 전세를 살게 되었다.

그리고 상계동으로 이사하고 지금은 창동에 살고 있다. 아파트에서 산 지 삼십 년이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어릴 때부터 오십여 년 가까이 중랑천 인근에 살고 있다.

그시절 판잣집이 따개비같이 붙어있던 중랑천 변은 이제 벚나무, 장미터널과 함께 멋진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로 조성되어 있다.

악취와 오염으로 유명하던 중랑천이 잉어와 온갖 새들이 살고 있는 도심 휴식처로 바뀌었다.

 

50+서부 캠퍼스에서 주거환경 강좌를 진행하던 중에 수강생들 모두 각자의 ‘주거 연대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유형과 그 집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 과정을 진행하면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이 가지는 물질적, 물리적 의미보다 그 공간에서 살았던 가족 간의 추억들이 진하게 배어남을 알 수 있었다. 결국 과거에 살던 집은 기억 속에 있지만 그 공간에서의 삶은 현재 진행형처럼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모두들 집에 대한 행복한 기억, 또는 아직 잊지 못할 아픔 등을 생생하게 그 공간과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화단의 꽃이나 집 주변에 있던 나무, 골목의 형상까지 다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흥인지문에서 한성대역까지의 낙산도성길 순성길에서 바라본 북한산 방향.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흥인지문에서 한성대역까지의 낙산도성길 순성길 성곽 사이로 바라본 서울의 생소한 모습

 

내가 고향을 떠나온 지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기차를 타고 고향 인근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좋다.

차창 밖 멀리 고향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몇 년 전 부모님 팔순기념으로 부모님과 함께 고향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살던 초가집은 없어지고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집터에는 나를 늘 업어주시던 할머니와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와 아버지, 담장 곁에 피던 봉숭아, 그리고 호박꽃 속에 반딧불이를 잡아넣고 뛰어 다니던 친구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