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강변을 걷는다. 바람 따라 출렁이는 갈대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은빛 머리채를 흔들며 가벼워진 줄기들은 제멋대로 낭창거린다. 가녀린 몸으로 비벼대는 소리는 강물을 타고 흐른다. 푸른 물기를 제 몸에서 비워내며, 이제 가벼워질 일만 남은 갈꽃들이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처연하다.
최일남의 소설 ≪서울은 파스텔톤≫은 흥미롭게도 대화체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다. 정통적인 입담체의 진국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오래 묵은 술에서 느껴지는 맛처럼 뭉근하고 깊다. 머리숱이 갈대꽃처럼 바람에 푸슬푸슬 날리는 두 노인이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이다. 소설은 마치 연극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세트장에 막이 오르고 병실에 병문안을 온 객과 병실에 누운 주인장 격인 두 친구가 등장하여 질펀하게 쏟아놓는 수다가 전부이다. 서로 넘나들고 이죽거리며 전립선염이란 병명에 빗대 ‘물건’이야기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그건 그렇고 너는 괜찮니.”
“뭐가.”
“아직 쓸 만하냐고.”
“글쎄 뭐가 괜찮고 쓸 만해?”
“시침 떼지 마라.”
“갈수록.”
“크크. 구실을 못하는 게로구나.”
“체. 혼자 장구치고 북치네. 가만있자……너 지금.”
“흥. 이제 알아들었니? 능청치고는.”
“답잖게 말을 뱅뱅 돌리니까 그렇지. 하지만 걱정 놓아라. 성낼 때 성내고 얌전할 때 얌전하단다. 어쩔래.”
“누가 보았대?”
“이런 순…….”
비바람이 치려나. 눈이 오려나.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에도 병실 안이 한층 아늑하고 따뜻하다. 친구지간인 환자와 문병객의 ‘아랫녘’ 입담이 그래서 더욱 촉촉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뿐이다. 가다가 중지곳하여 더 이상 뻗지를 못한다. 객의 바지춤을 까내릴 기세로 다그치던 방주인은 네 사정 내가 다 안다는 투로 개실개실 웃고, 객은 객대로 메마른 입술에 밭은 침이나 두르는 것으로 자신의 허장성세를 눅인다.
p.391
삶은 이토록 지루한 농담처럼 이어지고,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갈대들은 삽시간에 불어대는 바람에 머리채를 흔들어댄다. 허연 갈꽃들이 수직으로 용솟음쳐 오르는 발기력, 뼈대 없이 솟구치는 발칙한 몸짓이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에로틱하게 펼쳐진다. 그런 풍경 너머로 열차가 덜커덩거리며 한강 철교 위를 건너고 있다.
‘차차 땅내가 고소한’ 두 노인의 생동감 있는 입담은 이 작품의 묘미이다. 모르고도 아는 척, 알고도 모르는 척 묘수를 부리는 솜씨가 가히 메가톤급이다.
“서울.”
“딱지 떼는 서울이 한두 군데라야 말이지.”
“종로.”
“것도 나허고 같네. 우리는 서울에 동정을 바친 세대구나.”
“자기 위해 바쳤지. 서울 위해 바쳤냐.”
“두말하면 잔소리.”
“이왕이면 보리밭이나 물레방앗간이…….”
“농담도 너무 때가 낀 농담은 천하게 들리는 법이다. 하물며 보릿고개를 타고 넘느라 피똥 쌀 때 아니냐.”
“나는 그나마 딱지를 절반밖에 떼지 못하고 줄행랑쳤다.”
“별놈 다 보네.”
“가는 날이 장날이었어. 공교롭게도 우범 단속의 밤과 겹칠 줄 누가 알았나. 경찰들이 휙휙 호루라기를 불어대니까 어서 나가라고 밀어내지 뭐야. 그 바람에…….”
p.395
듬성듬성 남은 허연 두발을 번갈아 쓸어 올리며 두 노인은 티격태격 다툰다. 옅은 가루분 같은 햇살이 병실에 비쳐든다. 너나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 겨우 턱걸이한 직장에 죽을 둥 살 둥 매달리며 가까스로 터 잡은 서울 생활이 아니던가. 위태위태한 생을 등에 지고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던 때다. ≪서울은 파스텔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서울은 …혼돈의 도가니였어. 분단을 등에 지고 내려온 피난민에, 새 살 길을 찾아 올라온 농촌인구가 뒤섞여 수도의 정체성쯤은 간 곳이 없지 않았느냐.” 서울말이 정작 팔도 사투리의 하나로 되는 이야기를 통해 사는 것이 죄다 동서양의 짬뽕이라는 주인공들의 분석은 무척 흥미롭다.
“어투가 그래. 하여튼 난생처음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확성기에서 터져 나온, 억양이 독특한 소리……서어우울, 서어우울, 여기는 서울, 여기는 서울, 본 열차의 종착역입니다. 잃어버린 물건 없이……어쩌고저쩌고. 주욱주욱 늘여 빼다가 갑자기 빨라지는 안내 방송이 귀에 아직 쟁쟁하다. 지방에서도 더러 듣기는 했으나 몽매간에 그리던 서울이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두근 울렁거리고 감격과 불안이 비빔밥처럼 한데 얼려…….”
“틀렸다. 서울역의 확성기 소리가.”
“틀리다니.”
“역원은 서어우울, 서어우울, 했는지 모르지만 들리기는 셔어우울, 셔어우울이었어.”
p.407
나도 소설의 두 주인공들처럼 80년대 중반, 턱걸이하듯 겨우 서울에 닿았다. 그동안 강산이 몇 차례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다.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 중에 한강 철교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밤새 어둠을 뚫고 달린 열차가 막 한강을 건너려는 찰나에 기적도 목이 메어 절규했다. “투당탕탕, 철컥철컥, 뛰익!” 열차는 울며불며 강을 건넜다. 창가에 휙휙 스치던 철골 아치는 시골뜨기의 나의 혼을 빼고도 남았다. 드디어 서울특별시민으로 편입되었다는 현실이 가슴 떨리기도 했고, 반면에 낯설음에 몸을 떨었다.
병실에 앉아 주고받는 두 노인들의 이야기는 우스개 같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찌 보면 삶이라는 것은 늘 진지한 것도 아니다. 한바탕 놀이처럼 가볍게 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 아니던가. 당겼다 늦췄다 하는 두 노인의 말장난이 바로 이 소설의 깊은 맛이다.
“그와는 다른 각도에서 나는 때때로 면구스럽다. 서울 초년의 너는 오줌을 지렸다고 했는데, 서울 말년의 나는 마음이 저리다. 조그마한 자극, 예를 들면 방송극을 보다가도 무심결에 콧등이 시큰거려 마누라 얼굴을 정시하지 못하는 의젓잖음……이것도 병이겠지.”
“빠이쁘 고장보다야 백배 나으니 걱정 말아라.”
“뿐만이 아냐. 보아라. 창밖의 저 앙상한 나목. 가다가는 저런 것들까지도 절절한 감성을 들추자고 덤비네? 절대로 슬프거나 나쁜 기분은 아닌데도 속절없이…….”
p.422
그들은 어설픈 시골뜨기도 고생 할지언정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 포용이 아니냐는 평가도 내린다. “궁극적으로 고맙지 뭐냐. 군말 없이 우리를 품에 안고 녹여준 서울이. 서울은 만인의 용광로였다.” 참으로 역설적 묘사다. 작가는 그런 애매모호한 모습의 서울을 `파스텔톤’이라고 풍자한 것은 아닐까.
선운사 동백꽃을 보고 돌아와
서울역은 붉은 벽돌 하나 베고 지친 듯 잠이 든다
나는 프란체스꼬의 집에 가서 콩나물비빔밥을 얻어먹고 돌아와
잠든 서울역에 라면박스를 깔고 몸을 누인다
잠은 오지 않는다
먹다 남은 소주를 병나발을 불고 나자 찬비가 내린다
동백꽃잎 하나가 빗물을 따라 플랫폼 쪽으로 흐른다
보고 싶은 사람은 흐르는 물과 같이 내버려두어도
언젠가는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게 되는지
한 미친 여자가 찬비에 떨다가 내게 입을 맞추고 옆에 눕는다
옷을 벗기자 여자의 젖무덤에서도 동백꽃 냄새가 난다
낡은 볼펜으로 이혼신고서를 쓰던 때가 언제이던가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대 옆에 남아 무덤이 되고 싶던 날들은 가고
다시 병나발을 불자 비안개가 몰려온다
안개 속에서 포크레인이 서울역을 끌고 어디로 간다
동백꽃 그림자가 눈에 밟힌다
≪흐르는 서울역≫ 정호승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1997, 창작과비평사
갈꽃 한 송이가 한강 철교를 달리는 열차에 올라탔다. 먹다 남은 소주를 병나발 불던, 낡은 볼펜으로 이혼신고서를 쓰던 이들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서울역은 우리들에게 분명 상징이었다. 서글픈 우리의 개발사와 현대사를 송두리째 담고 있는 삶의 장소였다. 서울사람들 보다 서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희로애락이 한데 뭉개진 공간이었다. 야간열차를 타고 밤늦은 시간에 서울에 닿은 이들은 피폐한 고향으로부터 무작정 상경한 선남선녀들이었다. 그들에게 ‘여기는 서울…….’이라는 안내방송은 처음으로 맞게 되는 생존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선운사 동백은 채 피기도 전에 모가지가 꺾여버렸다. 여리고도 강인한 목숨붙이들이 차디찬 광장에 질펀하게 누워 서울역을 바라본다. 열차는 플랫폼마다 제각각 사연을 엮어 고향으로, 고향으로 흐른다.
강변에 새들이 날아온다. 만리장천을 건너 편대비행을 하던 한 무리의 새떼들이 찬 강물에 내려앉는다. 거침없이 물속에 머리 박고 물구나무로 선 채 한 끼의 식사를 건져 올린다. 삶의 현장, 여기는 서울이다. 한강 철교 아래 갈대 꽃씨 하나가 초겨울 하늘로 먼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