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도시는 그 나름의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밤마다 그들의 작품을 탐독하며 존경하고 동경했던 톨스토이, 푸시킨의 나라 아니던가. 반짝이는 가치를 숨겨둔 곳, 그래서 더 매력적인 은둔의 장소가 바로 모스크바라는 도시다.
오후 세 시, 밝은 빛은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명멸하다가 마침내 어둠과 뒤섞였다. 모스크바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밤이 아닌,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텅 빈 활주로는 타이 사파이어처럼 푸른빛이 감돌았고, 몰아치는 비바람은 세상을 삼킬 듯 휘몰아쳤다.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무중력의 시간이 이어졌다.
8월의 무더운 일요일 오후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Шереметьево) 국제공항은 지독한 어둠에 휩싸여 있다. 열린 창문으로 한줄기 시원한 공기가 들어온다. 길 잃은 소리들이 점점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춘다. 지구의 어느 한쪽 편에는 하얀 밤이 계속될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이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다. 대낮의 하늘이 연극 무대처럼 장막을 깊게 드리운다.
서울을 떠난 비행기가 하루의 반을 지나자 고도를 낮추었다. 발 아래로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 땅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8월의 뙤약볕은 머리 위에서 강렬하게 쏟아졌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상공을 선회할 때, 햇빛이 커다란 날개에 한 움큼 튕기더니 눈을 뜰 수 없게 했다.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는 말로만 듣던 회색빛 도시도 아니었고, 그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비밀스러운 도시로 내게 첫인사를 건넸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입국장에 가득했다. ‘세르게이’가 공항 대합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가 왔다. 내 마음에는 하트가 뿅뿅 뿜어져 나왔다. 기대와 설렘이 현실과 딱 맞닥뜨렸을 때 나올 수 있는 여행자의 표정이었다. 공항 안에는 단 한 글자도 모르는 간판들과 광고들이 빼곡했다. 비행기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낯선 키릴 문자 속에서 나는 까막눈이었다.
“누나!”
“세르게이!”
훤칠한 미남 청년 세르게이는 내 여행 가방을 받아 끌며 겅중겅중 지하철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듯 어둡고 서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지하 궁전이 나타났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로 손꼽히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면 대리석 기둥과 샹들리에는 물론, 예술가들의 조각, 회화, 헤아릴 수 없도록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워낙 넓어서 그랬을까. 짓궂은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비밀 통로처럼 어디론가 연결되는 비밀의 문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세르게이는 유창한 한국어로 황당한 나의 호기심을 꾹 눌러주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우리는 밤거리를 쏘다녔다. 밤이지만 그다지 어둡지 않은, 그래서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그런 풍경이었다. 그래서 모스크바는 충분히 시(詩)적이었다. 드문드문 나트륨등이 켜있는 부근에만 밝아보여서 과감한 생략과 운율이 느껴졌다.
푸시킨의 동상 앞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술 부리듯, 빛과 어둠의 향연에 나는 넋을 놓았다. 마치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선율이 흐르고 있을 것만 같은 건물과 골목을 빠져 나와 베일에 싸인 모스크바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모스크바에서 나는 꿈틀꿈틀 아침을 시작했다. 세르게이와 함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동글동글한 양파 모양의 지붕을 한, 크렘린 궁전, 성 바실리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모스크바를 짧게 거쳐 갈 요량이었는데, 하룻밤 만에 나는 모스크바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우람한 석조 건물, 햇살을 가득 머금은 테라스, 여유로움이 넘쳐나던 공원, 세르게이의 친절까지 내 발목을 붙들었다.
굿바이,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Шереметьево) 국제공항으로 가는 차창 밖, 풍경은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뒤이어 모스크바의 추억도 허공에 흩어졌다. 뜨거운 포옹으로 세르게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드넓은 공항 활주로와 탁 트인 시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슬로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검은 구름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세시의 모스크바 하늘은 내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램브란트의 그림처럼 비현실적인 낮과 밤이 교차한다. 어디까지가 밤인지, 낮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나는 도무지 모스크바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내게 있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매혹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쩌면 빛나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아마도 그것은 볼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나는 날마다 어둠, 그 너머로 여행을 꿈꾼다.
우주의 하루가 깊은 어둠과 섞인다. 푸른색에서 창백한 담청색으로 변한 구름이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며 부풀어 오른다. 영원할 것 같은 짙푸른 어둠이 셰레메티예보(Шереметьево)공항 활주로에 깔린다. 달빛보다 맑고 부드러운 빛이 물결칠 때까지, 오슬로행 비행기는 몇 시간째 폭우 속에 납작 엎드려있다.
50+에세이작가단 김혜주(dadada-boo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