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탄생할 때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고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할 터, 여든 넘은 부모님을 뵐 때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세계가 흔적 없이 사라질까 두려워지곤 합니다.
사실 내 부모님의 삶은 유별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없이 넓고 크게 느껴지던 등이 작아 보인지도 꽤 됐습니다. 대학생일 때던가, 머리 좀 굵어졌다고 모진 말로 생채기를 내는 딸을 슬프게 바라보며 힘없이 돌아서는 부모님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습니다. 부모가 크고 넓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요. 자식의 일에 부모는 한없이 약해진다는 것을요. 그러나 그뿐, 애써 모른 척했습니다. 자식 때문에 포기해야 했을 꿈과 자식 위해 헌신한 수많은 시간이 아프게 다가온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자식이 철드는 동안 부모는 더 늙어있었겠지요.
내 나이 마흔 즈음, 고향에 갈 때면 엄마는 살아온 날들을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건너야 했던 참담한 시절과 견뎌야 했던 고통, 그리고 좋았던 기억과 쓰라린 기억을 말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히. 나이든 자식이 한결 편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입 밖으로 토해낼 수 있다는 것은 그 세월이 어느 정도 소화가 됐다는 의미일 테고요.
그런데 자식 마음은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듣는 내내 목 언저리가 홧홧해지는 겁니다. 그만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들어줄 창구가 필요할 테니까요. 딸의 속내야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잠이 들더군요. 그렁그렁 코까지 골면서 말이죠. 내 잠을 다 앗아간 것도 모르고요. 다음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예 참았던 눈물이 터졌습니다.
물론 내 엄마가 유난히 더 힘들게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이 해방되기 전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남성 상위시대에 태어난 여성 대다수가 겪었을 정도의 시련이랄까요. 부러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가늠조차 되지 않는 엄마의 외로움, 고단함, 절망, 트라우마 그리고 그 생이 서럽고 안쓰러워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겨우 생각한 게 회고록을 써보라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꾹꾹 눌러온 감정들을 더는 참지 말고 쏟아내 후련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범인으로서 이렇다 내세울 만한 성취 없이 살아온 보통의 생이었다며 손사래를 치더군요.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그 시절 누군들 그러지 않았겠냐고, 게다가 좋은 엄마조차 못 되었다고,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서툴고 부족해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그것이 여태 후회된다며 자책까지 하셨습니다. 부모들은 늘 그러십니다. 다 내주고도 더 못 줘 미안해하는 존재가 우리 부모들이죠.
해서 내가 엄마의 생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명색이 기업의 역사를 쓰는 사사(社史) 작가가 내 엄마의 역사 하나 못 쓰면 말이 안 되지, 싶었거든요. 비혼이라 지금까지도 부모의 걱정을 사는 자식, 부모가 되지 못해 부모의 마음이 무엇인지 온전히 다 알지 못하는 자식, 이걸로 자식 노릇 한 번 하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엄마는 당신의 생이 특별하지 않다지만, 내 엄마의 생은 내게 너무나 각별하기도 하고요. 내 생명의 근원이며 내 존재의 뿌리인 당신의 과거를 한 자 한 자 소중히 적어 고단했을, 외로웠을, 아팠을, 지금의 나보다 어린 그때의 당신을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애 많이 쓰셨다고,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감사하다고, 더 늦기 전에 존경을 담아 당신이 걸어온 여정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기록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전하는 연서인 거지요.
결론을 말하자면, 마음만 앞섰지 쓰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건, 밥벌이에 치여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엄마가 회고록을 직접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나는 체증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소화가 다 됐다는데 나는 도무지 소화가 안 돼 부지불식간 눈물을 쏟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여러분은 아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