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 가면 봄쑥이 쑥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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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봄을 추억한다. 언제나 기억 속의 시간이 또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맞는다. 어린 시절의 시간은 눈앞에서 아련하게 맴돌기도 하지만 이만치 나이 먹고 생겨난 추억들은 계절이 돌아오면 몸이 기억하고 마음이 움직인다. 그것이 누군가와 연관된 일이라면 가슴속 깊이 새겨져 더욱 사라지지 않는다.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통과의례처럼 쑥을 캔다. 요즘은 도심지나 주변의 하천변에서 자생하기도 하지만 선뜻 식용으로 먹기가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도심의 대기오염과 공장 등지에서 방출되는 중금속과 오염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동안은 알싸한 맛의 봄나물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한참 나이를 먹으니 이제 와서 맛들인 모양새다.
부모님이 먼 길을 떠난 후 해마다 그해 봄처럼 그 산길을 오른다. 초록의 숲과 싱그러운 자연의 내음, 그리고 그 길에 들면 괭이밥이랑 토끼풀이랑, 자잘한 들꽃들이 발아래서 빛난다. 자유롭게 훌쩍 자란 풀섶을 푹푹 밟으며 산길을 걷다 보면 봄나물이 언뜻언뜻 보인다. 한동안은 무심코 지나치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산을 내려오다가 쑥에 눈이 멈췄다. 공기 좋은 산속에서 자라난 쑥은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있어 풀 속에서 너무 이뻤다.
봄이 한참 지나고 있었던 즈음이라 이미 웃자란 쑥의 연한 윗부분을 하나씩 따기 시작했다. 봄나물이 온 산에 지천인지라 잠깐만 뜯었는데도 봉지에 수북하다. 아무도 없는 숲에 잠겨 조용히 쑥을 따는 것은 마치 도를 닦는 것처럼 경건하다. 마치 나만의 영역이고 나만의 권리인 듯 뿌듯하게 그 시간 속에 심취한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이 느낌을 해마다 누린다.
필자를 맞이하는 초록 빛깔의 쑥
처음에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늘 정신없이 숲에 찾아들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현대사회에 지치고 상처 받은 심신을 일 년에 딱 한 번 부모님 곁에 가서 위로를 받는 마음으로 찾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이토록 행복한 시간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예전 같으면 길에서 들에서 뛰어놀다가 아무렇게나 몇 줌 뜯어왔을 봄나물이었다. 이제는 “단군신화를 소환하는 전래동화 속의 식물이고 보릿고개 시절의 구황식물이었다”라는 옛날이야기의 쑥이다. 쑥은 어느 지역이나 상관없이 쑥쑥 잘 자라는 특성으로 자생력도 강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온통 잿더미로 변한 마당에도 가장 먼저 파릇하게 고개를 내민 것이 쑥이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쑥의 효능은 신비해서 민간요법의 약초로도 유용하다. 겨울 들녘의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봄나물의 기운은 당연히 효능을 지니고 있을 듯한 믿음이 생긴다. 특히 조선조의 민간요법에서는 단오날 오시(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에 뜯는 쑥이 약효가 좋다고 하여 이때 약 쑥을 뜯는 풍속도 있다.
또한 영양 성분이 좋아서 다양한 요리에 쓰임새가 있다. 쑥으로 떡을 만들고, 쑥국이나 쑥전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데쳐서 적당량씩 담아 냉동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이젠 웰빙식품이라 칭하기도 하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요즘은 현대인의 입맛에 따른 다양한 건강 메뉴가 나오고 있어서 색다른 맛으로 쑥을 맛볼 수 있다. 쑥 케이크, 쑥 스콘, 쑥 파스타, 쑥 라테... 예상치도 못한 맛으로 옛 정취의 쑥 요리들이 등장한다.
내게 봄날의 쑥은 그리움의 전령사다. 건강에 좋다 하시며 쑥맛 폴폴 풍기는 떡을 내 입에 넣어주던 엄마의 나이가 되니 이제야 알싸하고 향긋한 그 맛을 안다. 산나물은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도 그 맛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단군신화를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피 속에 쑥 향기가 전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 나는 엄마가 내게 주고 가신 작고 이쁜 질시루를 꺼냈다. 부모님이 계신 청정 숲에서 가득 담아온 파릇파릇한 쑥과 동네 방앗간에서 한 봉지 사온 쌀가루를 준비한다. 그리고 일 년 중 단 한 번 봄날의 행사처럼 엄마와의 추억을 버무리듯 쑥향 솔솔 쑥버무리를 만든다.
50+시민기자단 이현숙 기자 (newtree14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