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기자·작가·시인 신동열 작가를 만나다」
“배움에는 정년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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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궁금했다. 삶에서 정년이란 어떤 의미인지. 그러던 참에, 어느 글쓰기 모임에서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고 지난 4월에 정년 퇴임한 신동열 작가를 만났다. 공교롭게 한국경제신문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신문 ‘생글생글(생각하기와 글쓰기)’에 수년 째 연재중인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를 즐겨보는데, 바로 그 집필자였다. 나이보다 생각이 젊고 위트가 있었다. 인문적 소양도 넓고 깊었다. 그분의 다양한 글과 책, 시를 읽다 평소 궁금했던 ‘정년의 의미’를 듣고 싶어졌다. “들려줄 게 별로 없는 평범한 삶”이라며 몇 번 손사래를 쳤지만 나의 집요함(?)에 끝내 두 손을 드셨다.
“떠나도 머문 자리에 흔적이 남아요”
퇴직에 대해 말하는 신동열 작가
“참 이상해요. 33년이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신문사를 떠났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아쉽고 섭섭한 생각도, 두렵다는 생각도, 시원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온전한 평심이에요.”
뜻밖이었다. 퇴직의 소감을 묻는 말에 ‘온전한 평심’이라고 했다. 이유를 궁금해하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작가는 ‘책’을 화두로 꺼냈다.
“인생은 결국 머물다 떠나는 여정이지요. 한데, 그 머문 곳마다 흔적이 남아요. 흔히 삶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거라지만 빈손으로 가도 흔적은 더 오래 머물지요. 아마 신문사를 다니며 책 몇 권 쓰고, 시인으로 등단해 시집도 낸 것이 내적으로 힘이 된 듯합니다. 대부분 직책은 언젠가 전(前) 자가 따라오죠. 작가는 그게 없어요. 헤밍웨이를 전(前) 작가라 하지 않듯이요.”
조금 이해가 갔다. 떠나도 흔적이 뚜렷하면 결국 그곳에 머무는 셈이니까. 그에게 책은 이전과 이후, 인생 1막과 2막을 연결하는 든든한 고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신동열 작가는 청소년들의 생각을 키워주는 《굿바이 논리야》, 인생의 자기계발서 《내 인생 10년 후》, 인문학적 사유를 키우는 《구겨진 마음 펴기》를 썼다. 2017년 등단해 시집 《하루》와 《독백》도 냈다. 그 글들이 또 다른 세상으로 나오는 든든한 디딤돌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나를 돌아봤다. 내가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디딤돌은 무엇인지.
“디지털 배우기에 푹 빠졌지요”
“요즘요? 책 쓰는 것 미루고 디지털 공부하고 있어요. 화상 강의 줌(Zoom)도 배우고, 엑셀도 배우고, 구글 독스(Google Docs)도 배우고요. 많이 늦었지만 신기하고 재밌어요. 기자 시절 글 쓸 때는 주어진 포맷만 활용하면 됐거든요. 사실 제가 게으른 탓이죠. 제 주변에는 이미 그런 것에 능숙한 동료들이 많아요. 후회는 늘 뒤에 따라오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지금이라도 열심히 배우고 익혀 후회의 덩치를 쪼그라뜨려야죠. 평소 했던 말을 요즘 제 스스로가 하나둘 실감합니다. 인생은 곧 배움이고, 누구나 언젠가는 직장을 떠나지만 배움에는 정년이 없다고요.”
눈빛이 빛났다. 이런저런 디지털 배움 얘기를 할 때면 목소리도 한 단계 높아졌다. 새로운 세상에 푹 빠진 듯했다. ‘혹시라도 배우시다 막히면 디지털 쪽은 제가 살짝 가르쳐드릴 수도 있다’고 귀띔했더니 마스크 너머로 함박웃음이 비쳤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작가의 깊은 인생관도 조금 들여다보고 싶었다.
“인생은 타인을 배우는 시간이지요”
북카페에서 ‘왜 인문인가?’를 강의하는 신동열 작가
“인생은 타인을 배우는 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자(賢者)는 타인에게서 나를 보고, 우자(愚者)는 타인에게서 이방인을 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내 안에 타인을 담는 공간이 조금씩 커져간다는 의미지요. 나이 60을 넘어도 타인을 위한 공간이 좁쌀만하면 여전히 열 살 안팎의 미숙한 삶을 사는 셈이지요. 지식은 책에서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삶에서, 사유에서 길어 올려야지요. 성숙은 지혜를 머리와 가슴에 켜켜이 쌓아 올리는 거고요. 정년을 인생 1막과 2막을 나누는 가로막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년 후 삶은 인생이 더 무르익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면서 생각이 막히면 속칭 꼰대가 되거든요.”
타인과 성숙, 멈칫 내가 나를 돌아봤다. 내 안의 타인을 위한 공간은 얼마나 되는지, 내가 성숙한 과일로 익어가고 있는지. 잠시 생각을 추스르고 그의 꿈을 물었다. 정년 후 60대의 꿈은 어떤 형상일지 내가 가끔 궁금해한 바로 그 질문이었다.
“글 쓰고 강의하며 자아를 키우고 싶어요”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못하는 일을 끌어올리기보다 잘하는 일에 더 집중하라’고 했지요. 전 그 말에 동의합니다. 평생 기자를 했으니 글 쓰고, 강의하며 저의 자아를 키우고 싶습니다. 요즘 디지털을 배우는 것도 그런 길을 걷는 효율적 수단을 갖추는 과정이지요. 가성비가 중요한 시대가 됐으니 저도 그 코드에 좀 맞춰야죠(웃음). 시간 여유가 있으니 미뤄둔 책들도 좀 꺼내보고요. 삶은 어느 구간에서도 나름의 꿈이 있습니다. 자주 들여다보고 물을 주고 햇볕도 비춰줘야죠. 꿈이 시들면 영혼도 육체도 함께 시드니까요. 제가 가장 경계하는 건 정년 후 제 꿈이 시들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 삶의 초심을 돌아봅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로 33년을 지내며 깊은 사유와 감성의 촉을 벼려 펴낸 신동열 작가 저서
생각이 맑아졌다. 짧은 시간 얘기를 나눴지만 절반은 그의 얘기, 절반은 내 얘기를 듣는 듯했다. ‘내가 자주 만나는 다섯 사람의 평균 키가 바로 나’라는 말이 실감났다. 내 키가 순간 껑충 커진 듯했다. 정년 후엔 꿈이 시들 거라는 편견도 깨졌다. 집으로 오는 길, 전철안 에서 ‘꿈의 독백들이 삶에 빼곡하길’이라고 사인해 주신 시집 《독백》을 무릎 위에 놓고 그분의 인생관을 되새겨봤다. 논어 맹자 대학 역경이 입에서 철철철 쏟아지는 인물을 ‘철철문장’이라고 하던가. 신동열 작가 그랬다. 이모작 인생! 글 쓰고 강의하는 작가의 꿈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50+시민기자단 김경희 기자(bomsky6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