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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보다 여행의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어느 도시에서는 며칠 동안 머물기도 하지만, 어느 도시는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길 위에 풍경이 펼쳐지고 시간 속으로 길이 이어진다. 새롭게 만나는 길들이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자는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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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방겐 선착장에서 보스(Voss)까지 버스를 타고 가파른 외길을 달렸다. 버스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끼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끝도 없이 올라갔다.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아찔했지만 협곡들의 절경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구간이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버스가 중간에 정차했다. 잠시 쉬면서 구경하라고 말하는데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다. 버스에 탄 지 얼마나 됐다고 쉬는 것일까, 생각하며 사람들을 따라가다 깜짝 놀랐다. 산 정상에 스탈하임호텔이 있었는데, 보스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울창한 숲과 그 아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들, 급물살을 이뤄 흘러내리는 깨끗한 계곡물이 인상적이었다. 버스는 굽잇길을 지그재그로 내려가다가, 무지개를 거느린 웅장한 폭포를 차창 가득 담고서 아랫마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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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이어지다 꺾이고 다시, 휘어진다. 마치 강원도 고갯길을 넘어가는 느낌이다. 주춤거리며 달리는 버스 엔진소리가 색소폰 소리처럼 흐느낀다. 길 위에서 나는 시시로 외로움이 깊어진다. 그럴 때마다 외로움을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어느 시인은 한계령을 넘다가 못 잊을 사람하고 폭설에 갇히고 싶다 하지 않았던가.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이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벅차게 다가올 때, 나는 누군가에게 실없이 전화를 건다.

 

지금 보스로 가는 길이예요. 거긴 몇 신가요?”

묻지도 않는데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혼곤히 잠든 그의 잠을 흔들어놓는다.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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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디 대화가 이어지다 끊어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부를 묻는 사이에 버스정류장 앞에 버스가 멈춘다. 해맑은 표정을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어 버스를 세운다. 노란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파란색 후드티를 입은 아이는 젊은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탄다. 맞은편에 앉은 아이는 여행자의 모습이 낯설었는지 자꾸만 눈으로 장난을 건다. 나는 아이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화답을 한다. 아이가 까르르웃는다. 나는 신이 나서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잠시 녀석과 친구가 된다. 마음 한 끝에 자릿자릿 햇살이 닿는 것처럼 포근해진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다. 외로움은 어느새 달아나고 나는 아이처럼 조금씩 어려지고, 철없어지고, 해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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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시골마을인 보스(Voss)에 도착했다. 여유롭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숲과 산, 자연이 주는 에너지가 어디에서나 느껴지는 곳이었다. 버스 안에서 사귄 친구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이는 짧은 만남이 아쉬웠는지 엄마의 손을 잡고 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베르겐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보스 시내를 잠시 둘러볼 요량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오랜 역사를 느끼게 하는 보스 교회 쪽으로 걸었다. 잘 다듬어진 교회 뜰에는 먼저 살다가 떠난 이들의 묘지가 있었고 낮은 돌담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거나 뛰어가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나란히 공존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그들의 일상이 이곳을 처음 찾은 여행자에게 충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새 한 마리가 끼룩하는 울음소리 하나를 풀밭에 떨구고 태양을 가로 질러 호수 쪽으로 날아갔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보스(Voss)에서 또 하나의 꿈을 꾼다. 푸른 숲과 하얀 밤이 이어지는 이곳 어딘가에 쓸쓸한 여행자가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아주 잠깐, 길 위에서 만난 눈빛 맑은 꼬마 친구에게 밤늦도록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 ! 어쩌면 이 황당한 꿈이 이뤄질 것만 같다. 나는 길을 아끼며 걷는다. 여행자가 길 위에서 길을 아낄 때 그 여행은 참으로 행복하다. 보스역 플랫폼에 베르겐으로 가는 기차가 꿈결처럼 들어오고 있다

 

50+에세이작가단 김혜주(dadada-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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