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도 글도 아마추어여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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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詩처럼 누구한테 배워본 적은 없다. 하지만 둘 다 아주 오래된 취미다. 대략 중학생 시절부터 그림도 글도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엔 미술부와 문예부 활동을 동시에 하기도 했다. 그 시절,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일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현실은 어림도 없었다. 먹고 사는 데 보탬이 안 된다는 세상의 완고한 기준에 눌려 그저 취미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림 1 제주도 서귀포의 박수귀정 / 종이에 수채
대학은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경제학과를 갔고, 바로 취직이 됐다. 첫 보직은 광고홍보실. 어설프나마 그림과 글과 친한 게 회사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어설프긴 하지만 그간 쌓인 감각이란 게 있었으니까. 그 후론 쭉 광고 밥을 먹고 살았다.
詩는 책을 꾸준히 읽는 습관 때문에 오래 곁에 있었지만 그림은 쉽게 다시 시작하기 힘들었다. 아이들 숙제를 돕거나 한 십 년에 한 번 정도 어쩌다 재미로 그려보는 정도.
최근에는 그간 오래 써온 詩가 스스로 보기에 자꾸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 손을 놓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어림없는 그림 그리기 놀이를 다시 해보고 있다. 화구를 다시 사고 이것저것 스케치도 해보고. 하지만 생각은 멀쩡한데 손은 옛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디 지역 문화센터 같은 곳에라도 가서 다시 좀 배워야 하나 싶기도 했다. 어설픈 詩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덕지덕지 색만 입히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림을 그릴 땐 즐거웠다. 詩가 적합한 언어나 표현을 찾아내느라 다소 고통스러운 반면 그림은 좀 다르다. 기억해보면 어린 시절에도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즐거웠던 것 같다. 머리를 쥐어짤 필요 없이 그저 하얀 종이에 색과 선을 채워가는 일이 그저 좋았다. 어떨 땐 미술실에 혼자 남아 한나절 동안 그림을 그리곤 했던 기억도 있다. 실없이 콧노래까지 불러가면서.
詩 공부를 하면서 늘 글자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림으로 음악을 하고자 했던 러시아 추상화가 칸딘스키처럼. 그런 작업을 하는 훌륭한 시인들이 세상엔 이미 많지만 나 혼자만의 소박한 말로 詩를 그리고 싶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그 마음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래도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자니 덩달아 새삼 詩에 연민이 돋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림도 詩도 모두 아마추어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마추어여서 더 좋다. 독자나 전문가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온전히 나만의 행복을 위한 창작’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한때 문학소년, 소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있겠는가. 그때를 그저 추억으로 회상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 켜켜이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시작해 보시라. 누구보다 당신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다. 잘 쓰고 잘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쓰고 그리는 일이 즐겁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프로일지 모른다.
사계에서
김재덕
전화가 왔습니다
앞바다가 먼저 푸른 귀를 적십니다
전화 잘 안 하는데
그저 통화 한번 하고 싶어서요
삼방산이 피식 웃습니다
그곳은 비가 오지 않나요?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막상, 보면 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 걸 그리움이라 말할 수도 있겠죠
동그란 산과 평평한 바다
그 사이 초록색 호를 그리며 앉은 마을
멀리 마라도도 보이고
작은 물결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
사계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에서
그리운 비린내가 나네요
저녁엔
미역국을 끓여야겠습니다
50+시민기자단 김재덕 기자 (hamoone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