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집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형제애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지난밤, 옆집을 찾아간 아버지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아저씨한테 90°도 인사를 했고, 무조건 ‘죄송하다’ 사과를 했다. 아버지의 사투리를 용케 알아들은 아저씨는 지연, 학연, 혈연을 연결했다. 사돈의 팔촌쯤 되는 혈연을 찾아냈다. 도시개발 한복판에서 외롭게 버티던 두 가장은 그날 밤, 포장마차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늦여름에도 만발한 장미
“담장을 까부술 수는 없꼬 어차피 넘어오는 장미, 기앙이면 멋지게 넘겨보자구!”
아버지는 담장 아래 덩굴장미 줄기에 끈을 길게 묶고는 끈의 한쪽을 옆집 담장으로 던졌다. 옆집 아저씨는 그 끝을 자기 마당에 단단히 고정했다. 두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오후 늦게까지 덩굴장미를 묶더니, 다음 날에도 같은 작업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옆집이 아니라 담장 밖 골목으로 끈을 연결했다.
그해 초여름. 우리 집뿐만 아니라 골목까지 온통 장미로 붉게 물들여지고 장미향이 넘실거렸다. 장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이웃들이 하나둘 골목으로 나왔다. 휴일이면 자연스럽게 골목에 돗자리가 깔렸고 우리만의 장미 축제가 열렸다. 축제를 빛내주려 곁들이던 고기 파티가 축제의 주인공이 되는 바람에 나중에는 골목에 고기 향이 진동하긴 했지만…
장미 축제 이후, 골목 주변 집들은 이웃사촌이 되었다. 밥숟가락 개수까지는 알 순 없었지만 내 집 앞, 네 집 앞 가릴 것 없이 쓸고 닦았다. 봄에는 우리 집 장독대 옆 가마솥에서 온 동네 ²장 가르기를 하느라 며칠 동안 짠 내가 골목에 진동했다. 여름 휴가철이면 경희 언니네 로얄살롱 자동차를 빌려 타고 동해로 남해로 피서를 떠났다. 미처 피서를 못 간 이웃들은 골목에 커다란 고무다라이를 내놓았다. 아이들은 속옷 바람에 물놀이에 정신이 팔렸고, 어느 집에서 쪄내온 옥수수에 배고픈 줄 몰랐다. 바로 거기가 태릉 푸른 동산 수영장이었고 부곡하와이였다. 초겨울엔 김장 품앗이를 하느라 골목이 온통 매운 냄새 천지였다. 시시때때로 각자의 고향에서 올라오는 곡식이며 과일을 나눴다. 눈 내리는 날이면 낮이고 밤이고 골목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비질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높은 담장에 가로막히고 경제발전의 부속품으로 지쳐있던 사람들. 덩굴장미 한 그루에서 시작해 정원으로 골목으로 또 서로의 삶이 확장되어가는 기적을 만들었다. 옆집 아저씨가 이웃이 되고 그 이웃들이 스스럼없이 빚어내는 장면 하나하나가 어쩜 그리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던지, 마치 즉흥 하모니가 울리는 듯했다.
‘즉흥’이란 단어를 언급하고 보니, 얼마 전 우연히 만난 ³TED 강연 영상 하나가 떠오른다. 재즈 가수 시릴 에메(Cyrille Aimée)의 강의였는데, 그는 재즈 스캣, 즉 즉흥연주를 잘하고 싶다면 이런 것들에 유의하라며 몇 가지 방식을 이야기했다.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다. ‘지금에 집중하되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신경을 쓰지 말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되 나를 낮추어 상대에게 틈을 내어줘서 함께 대화하기.’ 그러고 보니, 산 67번지 골목 사람들의 하모니는 이웃이 함께 만들어내는 즉흥연주가 아니었을까? 그 시절의 내 아버지와 동네 이웃들은 어쩌면 스캣 연주자의 덕목을 일상적으로 표현하며 산 게 아니었을까?
산67번지 골목은 높은 빌딩에 갇혔다
아주 긴 세월 지나, 이젠 높은 빌딩에 둘러싸여 한여름에도 서늘한, 그때 그 골목에 서 있다. 축제의 현장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미 한 단을 사야겠다. 거실 가득히 장미향을 채우고 그때 함께 했던 이웃을 추억하며 나만의 장미 축제를 만끽하고프다.
¹재즈스캣 : 뜻이 없는 음절로 이어진 소리를 내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재즈 창법.
²장가르기 : 잘 숙성된 메주로 된장과 간장으로 가르는 일.
³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 일종의 재능 기부이자 지식 · 경험 공유 체계다. 주제를 제한하지 않고 모든 지적 호기심을 함께 충족하는 게 목표다.
50+에세이작가단 정호정(jhongj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