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꽃잎처럼 퍼지는 것 같았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지난 5월 1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정동에 소재한 이화여자고등학교 유관순 기념관이 그러했다. 그 안에는 기쁨, 반가움, 감격과 같은 밝은 감정들이 발랄하게 소용돌이쳤다. 1988년에 이화여고를 졸업한 88졸업생들은 준비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마치 어제도 본 듯한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마다 30년 전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어언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추억을 더듬으며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은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등장할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 담긴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겼다.
웃음과 추억과 설렘이 어우러졌던 시간
이날 열린 이화여고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는 88년 졸업 동창과 은사 등 200여 명이 참여해 총동창회와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또 이화라는 이름 안에서 특별한 시절을 누렸던 88한 배꽃들이 당시 담임과 학과목을 담당했던 스승 40여 명을 초대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과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1986년 국제적 대행사였던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1987년에는 민주항쟁이라는 격렬한 변혁의 과정을 겪고 대한민국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88년 졸업생들. 그들은 폭발적인 경제성장 속에서 소비문화의 정점이 된 199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사방에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들려오던 IMF 금융위기 속에서 30대를 맞이해야 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세대였다. 그렇게 쌓인 세월 속 할 얘기들이 어찌 한두 보따리만 될까.
“지나온 30년, 새로운 30년 가즈아!”
88졸업생 대표 고혜정 씨의 힘찬 목소리는 지난 세월 동안 짊어지고 왔던 어둠들을 날려 보내는 주문과도 같았다. 김혜정 현 이화여고 교장의 환영사로 시작된 1부 행사는 이자형 이화여고 총동창회장의 축하, 이화교회 이종용 목사의 축도로 이어졌다. 88졸업생 고혜정 대표가 장학기금과 동창기금, 학교발전기금을 각각 전달했다.
“창립 132주년을 맞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올해 30주년 재상봉 행사에서 88년도에 졸업한 학생들은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추억과 옛 감정을 잘 나눌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정성껏 준비하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함께해서 너무 보기 좋습니다.”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서 졸업생으로 참여한 이자형 총동창회장(1966년 졸업)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1부 행사가 은사들이 제자들에게 보내는 덕담이었다면 2부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50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바치는 재롱잔치(?)였다. 올해 여든다섯 살을 맞이한 최종옥 전 교장의 격려로 시작된 2부에서는 88졸업생이 준비한 축하 영상, 플라멩코 댄스, 찬양 댄스, 오보에 연주, 동문 합창 등 다채로운 축하 공연으로 영원한 스승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6개월 전부터 이 행사를 자체적으로 기획한 88졸업생들은 현수막부터 초대장, 은사님 선물꾸러미, 테이블 꽃꽂이, 꽃 코사지, 배너, 영상, PPT, 포토월, 크고 작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가진 모든 재능들을 한데 모아 행사를 성황리에 끝마쳤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
이날 행사는 함께한 모두가 교정 곳곳에 묻어둔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은사들과의 재상봉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학생으로 돌아간 88졸업생들은 이화라는 큰 그늘 속에서 살아온 30년을 지나 이제 어느덧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흰머리를 날리게 된 은사들을 보면서 추억과 감사함에 뭉클함을 느꼈다.
사회를 본 88졸업생 정성진 씨는 “건강하시고 정정하신 은사님들의 모습
에 얼핏 보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저도 선생님처럼 가슴에 열정을 품고 남은 인생 활기 있게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다짐했다.
88졸업생 한귀영 씨는 “나이 든 선생님들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과 연대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젠 선생님들과 맥주 한잔 하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친구처럼 수다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담임을 맡을 때 20대였던 선생님들도 여럿이었죠. 돌이켜보면, 20대에 우리들을 만나 선생님들도 많이 긴장되고 두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습니다.”
운영진으로 활동한 88졸업생은 “제 인생이 이화 덕분에 참 많이 빛났던 것 같아요. 너무 많이 웃고 떠들며 힐링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이런 기회를 준 동창회와 모교 동문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88졸업생 역시 “그동안 앞에서, 뒤에서 애써준 친구들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게 됐다”며 “88졸업생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라고 말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30년 세월 보내고 다시 맞는 새 인생
감동한 것은 88졸업생 동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편을 잡고 있는 스승 한소연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준비한 행사에 감사했어요. 이화의 정신은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과분한 대접에 미안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 가르치는 일에 좀 더 마음을 쏟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88한 배꽃들의 오늘 만남이 삶에 큰 활력이 되기를 바라며 50세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영원한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토닥거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은사들도 홈커밍데이를 잘 치른 88졸업생에게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보였다”며 한마디씩 치하했다.
지난해부터 88졸업생 대표로 뛰어다녔던 고혜정 씨는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준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모교 사랑과 은사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는 행사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화라는 이름보다 더 큰 버팀목이 있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30주년 재상봉을 시작으로 40주년, 50주년, 60주년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30년의 세월이란, 한 세대를 매듭짓고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김성수 선생님은 사은회를 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스승으로서의 대견함과 소회,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삶의 동지로서의 감격이 담겨 있었다.
“지천명의 나이, 지금까지 사느라 얼마나 많은 열정과 아픔과 정진의 인고가 있었겠는가? 자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한 세대를 사느라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는가? 은사로서,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가슴 벅찬 박수를 보내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