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아리타 야키(有田燒)는 사쓰마 야키 (薩摩燒)와 함께 일본 도예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예술 도자기 이미지가 강한 사쓰마 야키에 비해, 아리타 야키는 생활 도자기 이미지를 띠고 있다. 한때는 유럽 시장에서 아리타 야키 점이 같은 무게의 금값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다. 근세 일본의 잦은 전쟁과 경기 부침 과정에서 생활 도자기, 산업 도자기 이미지가 굳어져, 지금은 주부들의 사랑을 받는 주방 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봄가을 이곳에서 열리는 축제 때는 도자기 파시가 형성된다. 인구 2만 명의 아리타 마치(). 수많은 요와 도자기 가게, 노점상마다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 그릇 종류와 꽃병 같은 미술 공예품은 명성에 비해 값이 착하다. 이 도향이 갈수록 유명해지는 까닭이다. 봄 축제는 매년 2~3월, 도조제는 5월 4일부터, 가을 축제는 11월 하순에 열린다.

안내지도를 손에 들고 처음 찾아간 곳은 자석광(磁石鑛) 이즈미야마(泉山) 였다. 일본 최초의 도자기 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히젠(肥前) 사가 번영의 원천이 역사의 현장이다.

아리타 야키 시조 이삼평(李參平)이 곳에서 발견한 자석을 원료로 아름다운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인근에 있던 조선도공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손쉽게 자석 조달이 가능한 곳으로 가마를 옮겨온 것이다. 아무도 살지 않던 산골짜기 여기저기에 공방과 가마가 들어서고 창고와 도공들의 움막이 생겨났다. 세계적인 도자기 명소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즈미야마 자석광은 대단한 볼거리 였다. 400년이 넘도록 자석을 채굴해 없어진 봉우리 자리에 학교 운동장 넓이의 공터가 생겨났다. 콧구멍 같은 개의 갱도 안에서는 근년까지 자석이 채굴되었다.

자석광 입구에 우뚝 선 ‘이삼평발견지 자광지(李參平發見之磁鑛地)’라는 높다란 돌기둥이 아리타 도자기 역사의 시발점임을 말하고 있다. 우측 도로변 석장(石場)신사에는 도조(陶祖) 이삼 평의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까이 보니 동상이 아니라 반질반질 윤이 옥색 도자기 상이었다. ‘도자기의 신’에 대한 공경의 염이 담긴 보였다. 흰 두루마기 차림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이 영락없는 조선도공의 모습이다. 근엄한 표정에는 망향의 수심과 고난의 빛도 깃들어 있는 같았다.

그는 죽어서 일본의 신이 되었으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갔는지 분명치 않다. 후손들도 정체성에 혼돈을 느낀다. 1993년 대전 엑스포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때 만난 13대손 가네가에 쇼헤이(江省平)가 ‘귀향’ 의식을 갖지 못했던 것도 때문이었으리라.

 

 

공식적으로 그는 충청도 금강 마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삼평이 죽기 2년 전 스스로 작성해 남겼다는 고문서 ‘江舊記’에는 “정유재란 때 히젠 사가(佐賀)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에게 끌려와 그의 가신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게 맡겨졌다. 그는 금강도(金江島)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란 성을 갖게 되었으며, 다쿠 밑에서 18년 동안 도기를 만들었다” 고 기록돼 있다.

금강도가 어디냐를 놓고 설왕설래 끝에 금강 가까운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라는 결론이 내려져, 1990년 공식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삼평의 14대손도 “사가 현에서는 공식적으로 연행이었다고 했다”고 말했다(김충식, ‘슬픈 열도’, 2006).

이설도 많다. 아리타 첫 방문 때 동행했던 고 이진희(李進熙) 교수 의견은 이와 달랐다. 정유재란 때 김해에서 잡혀갔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근거는 그때 나베시마가 김해 왜성에서 농성 했고, 그의 성이 ‘’으로 바뀐 것도 ‘바다()를 강()으로 고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베시마가 조선도공을 제일 많이 붙잡아갔던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이야기다. “공주 학봉리 출신으로 광주의 관요에서 일하다가 왜군에게 납치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삼평은 처음 아리타 인근 다쿠(多久) 땅에 가마를 열었다. 자석이 없어 표면 이 거친 도기만 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번의 지원으로 1616년 아리타 덴구다니(天狗谷)에서 질 좋은 자석을 발견한 후에는 가마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순백색의 자기가 생산되어 아리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36만 석 사가 번의 연간 미곡 생산량 총액이 10만 냥일 때, 아리타 야키 매출액이 8만 냥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성세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삼평의 성공은 순식간에 아리타를 붐 타운으로 만들었다. 인근의 조선도 공들이 앞다투어 이 골짜기로 모여들어 가마와 공방을 차렸다. 덴구다니에 여기저기 제도시설이 생기고, 냇가에는 자석을 찧어 자토를 만드는 물레방아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조선도공에게 기술을 배운 일본도공까지 몰려들어 질서가 어지럽게 되자, 번의 엄격한 관리가 시작되었다. 조선 도공 150여 명을 제외한 얼치기들을 다 추방하고, 골짜기 아래위에 검문소를 두어 사람과 물자 이동을 철저히 단속했다. 이때 쫓겨난 일본도공과 업계 종사자가 826명이었다니 초기 아리타의 상황이 눈에 잡힐 듯하다.

아리타 야키의 전성기는 바쿠후(幕府)시대 말기였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서 아리타 야키가 금상을 받은 것이 그 계기였다. 높이 2m 가까운 화려한 꽃병 등 처음 보는 도자기 장식품들이 유럽 각국 왕실과 귀족사 회의 호평을 산 것이다. 3년 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서 또다시 금상을 받게 되자 그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한·중·일 3국에 베트남 정도였다. 임진왜란과 중국 명·청 교대기 내전으로 나라 도자기가 쇠퇴한 틈에 일본 도자기 문화만 황금기를 맞은 것이다. 이삼평은 자기 애호가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좋은 중국 안료로 푸른 물감을 만들어 중국풍 그림을 그려 넣고 고열로 번씩 구워냈다. 이 제품들이 ‘이마리(IMARI)’라는 상표를 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출되자 귀족사회의 수요가 폭발했다.

그때부터 유럽 상류사회 취향에 맞춘 작품들이 생산되어 ‘이마리 도자기’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금색과 붉은색 안료를 많이 쓰는 중국풍 금란수() 양식의 아리타 야키는 화려함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고 권력자 도쿠가와 쇼군(將軍) 가문에까지 헌상되었을 정도다.

이삼평 시대 아리타 조선도공들은 가끔 날을 잡아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놀았다. 번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삼평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날은 즐겁게 마시고 망향의 정을 달래는 축제 날이었다. 고국의 노래와 춤이 없을 없는 법, 고마 오도리(高麗踊り)라 불린 춤판이 벌어졌다. 이 전통은 오래지 않아 번의 금지령으로 끊겼다. 술기운에 번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걱정한 탓이었으리라.

맥이 끊어질 것이 두려워 도공들은 축제 고려 춤을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번에 읍소했지만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의 풍속과 혈통을 이어가게 사쓰마 번과 비교되는 태도였다.

그들이 야유회를 벌이던 장소에는 현재 도산(陶山)신사와 이삼평 비가 우뚝 서서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후세 도공 들이 이삼평을 신으로 모신 도산신사 위에 오벨리스크를 본뜬 거대한 비석을 세워 아리타 야키 300년을 기념한 것이다. 봄이면 벚꽃으로도 유명한 소다.

신사는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선 시가지 건너편 산비탈에 있다. 사세보선 철길을 건너 산록에서 직선으로 뻗어 오른 가파른 돌계단을 잠시 오르니, 이삼평을 신으로 모신 도산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돌계단 위에 하늘 ‘’ 자를 닮은 아름다운 도자기 도리이(鳥居)가 발을 크게 벌리고 있다. 도자기 마을다운 발상이다. 일본에 하나뿐인 도자기(분청사기) 도리이라 한다.

신사는 이삼평 타계 3년 후인 1658년에 창사되었다. 처음에는 고대 오우진(應神) 천황을 모시다가 후세에 이삼평과 사가 번주 나베시마를 합사하게 됐다고 한다. 아리타 마을이 생기자 신사를 짓고, 이웃 고을 이마리의 팔번궁 (八幡宮)신사에서 오우진 신위를 옮겨 주제신으로 삼았다.

이삼평과 나베시마 도산신사에 혼령이 합사된 것은 1917년 아리타 야키 300주년 때였다고 한다. 아리타 도자기 개조(開祖) 이삼평을 신으로 떠받들면서, 자광 발견을 지원하고 도공들이 안심하고 일할 있도록 보살폈다는 이유로 나베시마까지 합사한 것이다. 고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붙잡힌 자와 붙잡은 자가 함께 제삿밥을 얻어먹는 형국이 되었다.

도산신사를 지나 한참을 올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가며 30분쯤 오른 자리에 하늘을 찌를 듯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가 있다. 높이 5m가 넘어 보였다. 화강암 비석 뒷면에 나베시마 후손이 글씨를 쓰고, 다이쇼(大正) 13년 10월에 세웠다는 비기가 새겨져 있다.

해발 349m 봉우리 꼭대기에 화강암으로 대지(臺地)를 조성하고, 그 위에 세운 비석의 위용이 시가지를 압도하듯 우뚝하다. 비석 옆의 도판(陶板)에 새겨진 안내문에는 ‘1616년 이삼평이 자광을 발견해 아리타 야키를 창업한 지 300년을 기념해 건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석 이름이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인 것도 눈여겨볼 일이다. 이삼평은 일본에 끌려와 가네가에 산페이(江三兵衛)로 불렸다. 그런데 창업 300주년 기념사업 이삼평이라는 본명으로 비를 세운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수많은 조선도공의 후예들 치열하게 주장하고 밀어붙이지 않았어도 관철되었을까. 그 덕분에 도조는 지금까지 조선 이름으로 불리게 것이리라.

 

 

산을 내려서니 어느덧 일본의 짧은 저물었다. 인터넷으로 예약해둔 민숙(민박) 집을 찾아가려고 유명한 아리타관에 들러 지번을 댔더니, 멀지 않은 곳이라며 친절히 가르쳐줬다. 숙소에 들기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좀처럼 음식점 찾기가 어려웠다. 아픈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마다 휴업이거나 영업 시간 종료라 했다. 먹거리 천국인 다른 도시들과는 크게 달랐다. 예술도시의 품격을 말해주는 같았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낸 곳이 ‘갤러리 아리타’라는 유명한 도자기 식당이었다. 식사 벽면을 가득 장식한 2000개의 찻잔 가운데 하나를 골라 차를 받아 마실 있는 곳이었다.

다음 새벽 6시, 민숙 집을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아침 끼니를 해결할 곳이 없었다. 나중에 편의점에 들르기로 하고 일찍 취재에 나섰다. 교통편도 마찬가지여서 어제처럼 걷기로 했다. 이삼평 묘소는 멀지 않았다. 지도를 보니 아리타관에서 왼편 골목으로 접어들어 500m쯤 떨어진 곳이었다.

아리타 소학교를 지나자 오른편으로 길가에 면한 공동묘지가 나왔다. 200 여 되어 보이는 묘지 한가운데 가네 가에 산페이라는 일본 이름의 팻말이 있었다. 반 토막 묘비 앞에는 시든 꽃이 꽂혀 있었다. 비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위의 ‘’ 자와 ‘월창정 심거사(月窓淨心居士)’는 분명한데 다른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했다. 그는 아마도 불교에 귀의해 월창이라는 계명 (戒名)을 가졌던 듯하다.

“1967년 아리타 용천사에서 사망자 이름과 수계(受戒)명을 적은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月窓淨人 三兵衛 明曆元年 乙未 8 11’이라 적혀 있다”는 유홍준 교수의 고증은 귀국 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을 보고 알았다. 이삼평의 이름과 몰년(1655년)이 일치하는 기록이다.

묘소에서 불과 100m 남짓 상류 쪽에는 덴구다니 가마터가 있다. 20°는 되어 보이는 비탈에 계단식으로 가마터 기가 정비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둘뿐이지만 발굴조사 때는 기가 확인되었다 한다. 일본 최초의 도자기 생산 현장, 일본의 사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제일 아래쪽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위로 불길이 치솟으며 그릇을 구웠으리라.

가마 아래쪽 마을에 ‘사라야마대관소 (皿山代官所) 자리’라는 안내판이 있다. 대관소란 관리가 주재하던 곳이다. 도자기 생산과 유통에 관련한 일체의 행위가 일일이 체크되었을 모습이 상상됐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는 지금도 광석을 찧던 물레방아가 남아 있다. 돌을 찧어 가루로 만드는 일을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수력을 이용했던 도광시설의 잔재다.

이삼평은 가마와 공방과 방앗간이 있던 골짜기 시라카와(白川) 마을에 살았다. 밥 먹으면 일터로 나가 종일 물레를 돌려 작품을 만들거나 그것을 굽고, 저물면 돌아와 잠자는 일상의 연속이었으리라. 그렇게 생산한 작품들은 모두 번에 납입되고, 작가는 걱정 없이 먹고 정도의 기계 같은 일상이었으리라. 후손들에게 번듯한 무엇 하나 남겨준 없는 것으로 보아 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와 동료들의 그런 헌신으로 사가 일본은 번영을 구가했고, 오늘 같은 문명국이 되었다. 취재를 마치고 귀로에 들른 사가 시가지에는 영화 재현의 염원을 담은 깃발이 거리마다 펄럭이고 있었다. ‘150년 전의 사가에 힌트가 있다’는 깃발의 메시지에 사가 도예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는 같았다

 

문창재 언론인(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bravo_lo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