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生,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 - 김애양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3년 전 한국의사수필가협회 정기총회. 나(앞줄 가운데)는 이 협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나는 안경 대신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눈이 나쁘단 사실을 한동안 숨겨왔다. 우리 시절엔 여자가 안경을 쓰는 걸 터부시했었으니까. 예를 들어 택시기사도 안경 쓴 여자를 첫손님으로 받으면 온종일 재수가 없단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나 할까? 맞선 보는 자리에 안경을 쓴 색싯감은 일순위로 딱지를 맞았다는 일화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시의 원인은 아직도 잘 모른다는데, 대개 어두운 데서 책을 읽는다든가 눈에다 너무 가깝게 대고 본다든가 텔레비전 앞에 바투 앉아 시청을 한다든가 등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절대로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텔레비전은 구경도 못하고 자란 내가 시력이 나빠진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최루탄 탓이라 믿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었는데 몇 정거장만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와 맞닿았다. 그 당시 대학교 근처에 산다는 건 곧바로 최루탄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았다. 4·19와 5·16땐 아직 어려 엄마 품에 있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지 그렇게 매운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부터 봄은 최루탄 가스와 함께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은 여지없이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데모를 벌였고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이 최루탄을 투척하면 매캐한 연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말았다. 그 겨자보다도 더 모질게 매운 최루탄 가스 앞에서 우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대학생들을 원망하곤 했다.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셨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다니…”

 

친구들과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다가 불발탄이 된 최루탄 조각이 땅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면 그게 마치 수류탄이기라도 되는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던 날도 많았다. 최루탄 가스가 눈이나 코, 피부로 들어가면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며 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어떤 땐 구토까지 일으키며, 피부가 온통 뒤집어지기도 했다. 일시적 실명현상까지 일으키는 최루탄 가스 세례를 해마다 받고도 내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매운 환경 속에 성장한 나는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안경잡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접어들었다. 안경 쓰기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대학생이 되면 절대 데모 따윈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이화여대 졸업을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김재남 전 동국대 교수는 일생을 셰익스피어

    연구에 바친 분이었다.

 

 

하지만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세상은 정권에 대해 반발하는 국민정서가 정점에 올랐던 그 시기였다. 나라가 흔들바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흉흉한 시절인지 모른다. 내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는 붉은 글씨로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대자보가 매일 새롭게 붙었다가 뒤돌아보면 어느새 떼어내고 없어지곤 했다. 교정 곳곳엔 날카로운 눈빛의 아저씨가 손에 워키토키 무전기를 들고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아저씨와 눈이 마주칠까봐 건물 뒤로 먼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늘 무언가 새로운 정보가 수군수군 퍼져나갔고 등사기로 민 조잡한 인쇄물이 나돌아 다녔다. 주로 ‘군사 정권을 타도하자’는 내용이었다. 캠퍼스 한곳에서 간헐적으로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여지없이 삽시간에 경찰버스가 밀어닥쳐 마치 닭장을 탈출한 어린 닭을 잡아들이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싣고 떠났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무 위에 유령처럼 숨어 있었던지 정보부 직원이 어느결에 나타나 군홧발로 잔디밭을 짓밟으며 데모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이 지성과 아무 관계없는 치열한 전투 현장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부마(釜馬)사태가 발발한 1979년 가을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서울역 앞에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과 대표가 결연한 모습으로 더는 침묵할 수 없으므로 한 곳에 모여 구국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아마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가장 큰 시위였을 것이다. 진압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들려 옷이 찢어지거나 신발을 잃어버린 학생들이 대다수였고, 곤봉으로 얻어맞은 친구들도 많았고, 몇몇 학생은 결국 붙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때 만일 나도 친구들을 따라 서울역에 갔었더라면….’

 

그때 서울역에 가는 대신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며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의과대학에 들어온 이유는 정치에 상관없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는 것인데 일일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참여하다 보면 언제 공부를 하겠어? 의사란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중시하고 또 실천하는 직업이 아닌가?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로잡을 테지…. 하지만 그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아왔던가?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못 외우면 손바닥을 대나무 회초리로 맞았고, 국어 시간엔 애국에 대한 표어를 짓고 미술 시간엔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자나 깨나 반공교육을 통해 공산주의를 무슨 괴물이거나 악마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간첩’이었을 것이다. 강원도에 살던 이승복이란 아이가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저항하다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몰살당했다는 뉴스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이승복은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1959년 12월 9일생이라서 결코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에도 무장공비가 출몰한다는 소식은 우리들 머리 위에 구름처럼 공포를 드리워 놓았다. 공포만큼 인간을 다스리기 편한 도구가 또 있을까? 청와대를 폭파하는 목적으로 남하했다는 간첩 김신조가 체포되었다는 속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하늘에서 불안감이 뚝뚝 떨어졌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면 어른들은 그게 모두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땐 북한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마련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향해 감긴 눈이 떠지는 건 아니다. 일간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던 평범한 여학생이 정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다른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서울역을 향해 뛰어가도 그건 지각없는 부화뇌동일 뿐이라 여겼다. 도서실에 두더지처럼 숨어 있던 나는 스스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착한 딸이라고 믿었다. 그땐 그랬다. 덕분에 안기부에 끌려가는 일 없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걸 안도해야 할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여러 가지로 평가해야겠지만 확실한 건 만일 내가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서게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땐 절대로 데모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시선으로 개인의 안정만 도모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2013년 9월 한국의사수필가협회의 큰 행사가 끝나고

 

 

▲최근 발간된 김애양 원장의 에세이집.

 

 

얼마 전부터 남미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권력과 억압에 대한 항거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짓밟힌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갔고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동안에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만 명의 실종자들이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구엘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는 어쩌면 그렇게 우리나라의 모습과 닮았던지 소름이 끼쳤다. 대통령의 심복이 겪는 불행이 비정한 군부정치의 생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또 로베르토 볼라뇨의 <부적>에는 멕시코시티의 대학에서 데모대가 진압 당할 때 화장실에 숨어서 13일을 연명한 우루과이 출신의 여대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건 실화를 가지고 만든 소설이어서 더욱 숨죽이며 읽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멕시코 시(詩)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는 조금 심오한 내용이다.

 

또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에는 여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의 강도를 연구하며 강간을 저지르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 의사는 성적 고문을 하는 동안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들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는데 이 희곡의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도 무방하다.’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만 봐도 독재란 전염병처럼 세상에 널리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던 데모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반향이었던 것이고 그런 데모에 동참하지 않았던 나는 전 세계적으로 비겁한 인물이 된 셈이다.

 

그런 중에 칠레 태생의 천재적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어느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양질의 글쓰기란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알고 쓰는 글’이라고.

 

그게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위험한 것이란 걸 알고 사는 삶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채 살아왔던가 보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안정과 자기 영달을 추구한다지만 내게 남은 세월엔 지난 부끄러움으로 더는 낯을 붉히지 않게 되길 소망한다.

 

 

 

 

 

김애양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