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가 파이프가 아니라고?

 

 

 

 

그 무렵 필자는 살바도르 달리에 빠져 있던 터라 달리만 본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르네 마그리트를 제쳐놓은 채 미술관을 나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1980년대에 미국 시카고미술관에서 르네 마그리트와 독대(獨對)할 기회가 있었다.

 

초현실주의 작품들 사이에서 별로 크지(63.5×93.98) 않은 ‘파이프(Pipe) 그림(위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학창 시절 파이프 담배를 즐겼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감상하는데, 문득 화폭에 있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동안 여러 번 이 ‘파이프 그림’을 봤지만 캔버스의 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터였다. 작품 설명, ‘불신의 초상화(The Treachery of Image 1926~1929)’만을 보고 부끄럽게도 별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의아해하며 한참 동안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던 어느 순간, 가슴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래! 작가는 파이프를 그렸을 뿐이지, 그림이 파이프 자체는 아니잖아!” 그 이후 필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에 새롭게 몰입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수많은 그림 중에서 ‘파이프 그림’과 맥을 같이하는 작품으로는 ‘통찰력(La clairvoyance 1936)’을 들 수 있다(아래 사진). 그림 속의 화가는 이젤 위의 캔버스에 날개를 펼친 채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새를 그리고 있다. 아울러 그림 속 화가는 왼쪽 손에 팔레트(Palette), 오른쪽 손에 붓을 들고, 시선은 옆 테이블에 놓인 달걀 모양의 새알을 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 르네 마그리트는 ‘통찰’이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정의한다. 사물을 보고 그 형태를 그리는 것은 스케치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진정한 통찰은 새알 자체를 넘어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를 꿰뚫어보는 것이라는 얘기다. 르네 마그리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지 아니하고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르네 마그리트가 왜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조선시대 초상 미술의 큰 화두였던 ‘전신사조(傳神寫照)’와도 일맥상통한다. 전신사조는 초상화를 그릴 때 피사체(被寫體)인 대상 인물의 외형 묘사보다 그 인물의 고매한 내면세계를 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세계를 보건대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에 이미 ‘초현실주의 사상’을 갈파(喝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