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이라.... 이건 뭐 생전에 치르는 장례식이다." 대형 은행에 입사하여 최선을 다해 일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사내 정치에 밀려 임원에는 오르지 못하고 자회사로 좌천당한 다시로 소스케. 결국 63세 나이에 정년퇴임을 맞이하게 된 그는 여전히 혈기왕성한 자신을 '끝난 사람' 취급하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문화센터나 헬스클럽을 오가며 시간 죽이는 노인네가 되긴 싫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주어진 막대한 시간을 소요할만한 다른 대안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우연한 기회에 '연애'도 꿈꾸고, 젊은 IT 기업 사장을 만나 성공적인 재기를 도전해볼 기회를 얻게 되지만,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던가. 때에 맞지 않는 의욕은 삶의 거대한 풍파가 되어 여생의 우환을 남기게 된다. 우치다테 마키코의 소설 [끝난 사람]은 나름 엘리트코스로 살아왔던 한 남자가 정년퇴임을 맞이하게 되면서,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제법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의 힘듦과 방황은 단순히 경제적 소득 중단의 문제가 아니다. 열성적인 성취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무쓸모의 영역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감정적 고통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은퇴하고 나서 똑같은 사람들이 나를 예전과 다르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사람들이 변한걸까, 내가 변한걸까. 통상 나는 똑같은데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달라졌다며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다. 사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연인'으로서 그 사람 자체로 타인과 관계 맺는다기보다, 어떤 회사에 다니냐, 어떤 학교를 나왔냐, 어느 동네에 사냐 등 다양한 '사회적 지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중 하나의 지표라도 사라지거나 변하면 당연히 사회적 관계에도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내 지위가 상승하면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부쩍 친절해지고, 지위가 하락하면 갑자기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다가 그 지표마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은퇴란 바로 나를 설명하던 거대한 지표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이 늘상 입어서 거의 자기 모습이 되어버린 유니폼을 벗고 맨몸으로 서게 되는 황망한 느낌처럼, 자길 설명하던 어떤 한 정체성이 무너지는 경험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게 필요하고, 사람 대 사람의 진솔한 소통이 중요하니, 이제 그깟 과거의 사회적 지표 따윈 벗어 던지라는 말들이 참 쉽게 난무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기 성격대로 감정을 표출하며 살긴 어렵다는 건 다들 잘 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숨기고 감추는 법을 오랜 시간 훈련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님이면 선생님답게, 공무원이면 공무원답게, 학생이면 학생답게, 사장이면 사장답게……. 정확하게 무엇이 그 '다움'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걸맞는 정답인지 잘 모르지만, 여튼 '나답게'보다는 '사회적 직급'다울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아왔고 우린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회적 지표가 사라진 그 부분에서 나의 맨살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걸 못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는 너무 많다. 한 은퇴하신 교장 선생님이 바른 행실을 계도하는 말씀은 학교에서는 용인되지만, 나중에 은퇴 이후 창업하신 편의점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과 같다.
원하건 원치 않건 무장해제하고 오롯이 자연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늙는다는 건 몸도 마음도 쇠하는 일이고, 벌지 못한다면 가진 걸 소진하며 살아야 해서 그 어떤 삶의 이슈보다 생존 그 자체가 크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몸이 건강하여 잘 작동하고, 잘 먹고, 잘 자고 하는 일이 나라의 경제발전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훨씬 중요해진다는 말이다. 이런 순리 혹은 변화에 대하여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하여 다가오는 삶에 대처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남'에 비견할만한 고통이다. 그래서 많은 은퇴 준비 과정에 'Reborn'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상황의 변화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때와 장소에 맞게 자신의 정체성을 원활하게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큰 변화 앞에서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놀라운 점은 생각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힘들다고 느끼거나 인정하는 사람이 또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이까짓 것 힘들지 않다고 '부인'하거나, 이보다 더한 일들도 얼마든지 헤쳐왔는데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절하'해버리곤 한다. 분명 표정도 황망하고 얼굴빛도 좋지 않은데 습관처럼 괜찮다고 한다. 마치 괜찮아야 한다고, 무너져선 안 된다고 강한 자기 암시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슬픔과 고통에 빠져 있게 되면 무슨 역병에라도 걸려 큰일날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즐거운 일'과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은퇴 이후 나이 들어감에 대한 경제적 준비 방안에 대한 질문이 참 많다. 사는 데 돈이 다가 아니듯, 노후 준비도 돈이 다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타고난 성향이 노후의 경제적 상황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남 힘든 꼴 못보는 사람은 뜯어말려도 자기 가진 돈 다 털어 남을 돕는다. 사람 많이 만나면 괜한 돈 든다며 있는 관계, 없는 관계 다 정리해버리고 혼자서 사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결국 자기 생겨먹은 성향을 제대로 아는 것이 노후 돈 관리에서 중요한 포인트다.
지금까지 억누르고 살았던 자기다움을 찾아내고 발견하여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감정의 수용과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나다움은 내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부분을 계속 외면하거나 무시하면 거대한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기도 하다. 은퇴의 경제학은 뭔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나가는 '포지티브 전략'이라기보다, 있는 것을 덜 손해 보는 '네거티브 전략'이다.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빠른 생각'과 '느린 생각'의 상호작용으로 살아간다. '빠른 생각'이 본능적 직관에 해당한다면, '느린 생각'은 추후 발달되는 이성과 종합적 판단의 영역이다. '느린 생각'은 '빠른 생각'에 비해 뒤늦게 발달되지만, 나이가 들면서 먼저 퇴행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이것저것 다 쇠퇴하여 결국 본능에 충실한 감정만 남게 되는 상태로 간다는 의미기도 하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어린아이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건 결국 어린아이로 와서 다시 어린아이처럼 되어 떠나게 마련인 인생의 섭리 같다. 어린아이는 황금보다 사탕을 택하게 마련이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은 내 편이고, 나한테 싫은 소리하는 사람은 적으로 구분하며 본연의 동물적 안전 감각으로 퇴행하게 된다. 이러한 퇴행은 노후 생활의 안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르신들을 현혹해서 값싼 약을 비싼 값에 속여 판 약장수 일당이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어르신들이 구명운동을 펼치며 풀어달라고 한 뉴스가 있었다. 노인들은 '우리가 바본 줄 아냐, 돈은 중요하지 않다, 비싼 줄 알고도 샀다'는 것이다. 자식들은 얼굴 한 번 제대로 내비추지 않는데, 약장수들은 진심 애써 노인들과 재밌게 놀아드렸고 그게 너무 고마워서 돈은 사기당한게 아니라고 하니 경찰도 안 풀어줄 수가 없었다. 잔소리하는 자식보다 살갑게 구는 남이 낫다며 자기 유산을 갑자기 생판 모르고 지내다 최근에 알게 된 사람에게 넘기겠다고 하여 가족 싸움이 벌어진 경우도 많다. 한참 건강할 때야 내 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만, 그래도 내가 병들고 몸져 누워 간병기에 진입하게 되면 누가 내 뒷수발을 들어주게 될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자식들 못 믿는다며 요양원 들어가겠다고 큰 소리치시는 분들을 자주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분 뜻대로 되긴 힘들다. 요양원 들어가도 가족 돌봄은 필수다. 지금 내게 입안의 혀처럼 구는 그 사람이 내 간병기에 내 병수발 해줄 사람이라면 투자가 아깝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될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생전 내 시간과 돈은 내 우선순위에 맞게 써도 그만이지만, 정리를 앞둔 사람은 가급적 나를 맡길 사람에게 남겨진 시간과 돈을 써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의 감정을 헤아리고 솔직하게 돌아봄으로써 자기다움을 찾는 것은, 건강할 땐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바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시간과 자원을 배분하도록 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좀더 늙어 건강하지 못할 땐 '느린 생각'의 쇠퇴에 따라 감정의 왜곡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그 왜곡에 대처할 수 있는 자기만의 경제 시스템을 갖추도록 독려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례를 몇 가지만 정리해보자.
- 현금화가 필요하다.
수억의 부동산 자산이 있더라도 이는 생계비가 되어주지 못하며, 자손들의 분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60세 이후부터는 천천히 자산 정리를 통해 현금화를 도모해둘 필요가 있다.
- 연금화가 필요하다.
목돈을 쥐고 있으면 자기 감정에 휘둘려 큰 사고를 치기 십상이다. 이를 신탁이나 가입즉시연금 등을 활용하여 연금화시키면, 내가 돈 사고를 치더라도 큰 사고를 막고, 다음 달에 무사히 다음의 생활비가 나오게 된다. - 쓰고 가는 플랜이 최선이다.
그러나 자손에게 조금이라도 물려주고 싶면, 자산 배분에 대한 유서는 미리 작성해두되, 미리 알리거나 실제 집행을 서둘러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식에게 몽땅 넘기고 나를 의탁하는 방식은 자식을 시험에 들게 할 뿐이다.
<추천도서>
끝난 사람 - 우치다테 마키코
다 쓰고 죽어라 - 스테판 M. 폴란 , 마크 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