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시골에 사는 차기설·정현숙씨 부부
연꽃처럼 맑게, 순하게

 

 

 

 

서울이라는 ‘황야’를 누벼 먹이를 물어 나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새벽 침상에서 와다닥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실려 가는 출근길부터가 고역이다. 직장에선 너구리 같은 상사와 노새처럼 영악한 후배들 사이에 끼어 종일토록 끙끙댄다. 퇴근길에 주점을 들러 소주병 두어 개를 쓰러뜨리며 피로를 씻어보지만, 쓰린 속을 움켜쥐고 깨어난 이튿날 새벽이면, 황급히 넥타이를 목에 동여매고 다시 일터로 달려가야 한다.

이 치열하고도 고단한 양상은 일과처럼 반복되기 십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라는 도둑은 사람의 청춘은 물론, 꿈과 희망, 체력과 정력까지를 앗아가고, 급기야 생의 강 하류에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정년(停年)이라는 일종의 날벼락이 도래하는 건 이즈음이다. 올해로 13년째 시골생활을 하는 차기설(62)씨의 귀농 계기도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의 고민에서 주어졌다.

 

“쉰 살에 가까워질 때였어요. 정년 뒤엔 뭘 할까? 뭘 해서 먹고 살까? 어떻게 살아야 노년의 안정을 구가할 수 있을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아파트 경비원을 하기는 그렇고, 날마다 기름내에 절어 살아야 하는 통닭집을 하기도 싫고, 대체 무얼 하면 좋을지 궁리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문득 어! 농사? 옳지, 농사가 괜찮지 않을까? 그건 정년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착상을 하게 됐어요.” “세상에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 과히 권장할 일이 아니라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선생은 농사 경험조차 전무했다죠?”

 

 

 

 

“섬세하게 재거나 따지지 않았어요. 일단 농사에 필이 꽂히자 자못 매력적인 직업일 거라는, 가망성 있을 거라는 결론에 곧장 닿았어요. 일테면, 상당히 무모하게 귀농한 것이죠. 그러나 무작정 귀농을 하면 실패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기에 준비랄까, 공부랄까, 그런 건 미리 좀 해뒀죠.”

“흔히 아내들은 귀농을 꺼려합니다. 고생길이 뻔히 보여서. 부인께선 아마도 반대했겠죠? 당신 혼자 잘해보소서! 그러며….”
“어, 잘 아시네? 제 아내(정현숙·56) 역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처음 딱 한 번 내려와 보고 나서는 발걸음을 끊어버립디다. 3년 정도가 지난 뒤에야 합류를 했죠. 농사를 한답시고 혼자 먹고 자는 저의 몰골이 형편없어서였죠(웃음).”

 

차기설씨는 건축 관련 잡지사 편집장을 끝으로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검게 그은 피부, 소탈한 매무새, 거칠어진 손…. 농사꾼으로 변신한 지 오래인 그의 외형은 날렵한 도시인의 그것과 다르다. 억실억실 전신에 무르녹은 농부다운 풍색을 통해 그가 이미 머리 대신 몸을 쓰는 근로와 근면을 숭상하는 사람으로 변한 걸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과거에 지녔던 인생에 대한 관점과 사유도 새로운 지평을 굽이치고 있을 법한 일. 여하튼, 유한한 인생에 흥미와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반전과 반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차기설씨는 귀농으로써 방향타를 휘익 돌려 미지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연꽃에 심은 꿈

차기설씨의 농장엔 ‘우리 맘 연애(蓮愛) 이야기’라는 달달한 이름이 붙어 있다. 연꽃을 테마로 한 농원이다. 연(蓮)을 길러 거두어 연잎밥, 연잎차, 연근차, 연근환 같은 가공식품을 생산한다. 요새는 전국 도처에 연꽃농원이 산재하지만, 그가 연 농사에 뛰어들었던 당시엔 미답의 영역이었다지. 어떤 내력으로 연 농사를 시작했지?

“귀농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건 작목 선택이라는 문제였어요. 저의 성향과 실력에 부합하는 작목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죠. 흠. 나름대로 파악을 하고 보니, 쌈채류는 돈은 되는 대신 매우 부지런해야 하는 작목입디다. 날마다 꼬박꼬박 상품을 출하해야 하니까. 그러나 저는 몹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라 적합하지 않다 봤어요. 과수는 어떤가? 이건 노련한 전지(剪枝) 등 갖가지 노하우가 필요하고, 벼농사의 경우는 장비 구입에 비용이 너무 많이 먹힌다는 걸 알았어요. 포기해야 할 작목들이었죠. 그럼 뭘 하나? 별다른 장비 없이 최소의 농토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목, 1차 농업이 아닌 가공 농업, 그게 뭘까, 오래 고심했는데, 어느 날 문득 연꽃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연이다, 연꽃에 꿈을 심자, 그런 작심에 이르렀던 겁니다.”

 

“시인의 영감처럼, 별안간 연꽃 농사를 발상한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40대 중반 즈음, 공주 시골에 사는 친척 형님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 형님을 찾아 내려갔는데 아, 글쎄 1만 평에 달하는 연밭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양반의 요점이 뭐냐 하면, 앞으로 연 농사가 유망할 것이다, 연을 활용한 각종 가공식품이 각광받을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어요. 심드렁히, 건성으로 들어 넘기고 말았죠. 당시엔 귀농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거니와 시골살이에 동경 같은 것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몇 년 뒤, 그 형님의 연 농사 권장에 썩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일이 시작됐어요.”

은인을 만난 셈이다.

“초기 한동안은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너무도 힘들었거든요. 온통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들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연 재배나 가공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비용도 생각보다는 많이 들었죠. 연 방죽에 드디어 연꽃이 만개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뭐 변변히 팔 게 없었어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만 잔뜩 쌓이더라고.”

“부인의 불평불만도 쌓였고?”

“남편으로서 스타일 구겨지는 상황이었죠. 당시에 팔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수련뿐이었어요. 그래 간간이 수련을 팔며 활로를 모색했는데, 사람들이 요구하길 수련을 아예 자배기에 심어달라고들 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장에 자배기를 들여오고, 덩달아 갖가지 항아리며 질그릇을 왕창 떼다가 전시 판매하게 됐어요. 뜻밖에도 그게 먹혀들었어요. 연꽃 농원이지만 그릇 장사로 재미를 봤고, 그게 정착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후, 연 가공식품의 생산과 판매에 탄력이 붙었죠.”

 

차기설씨의 농원은 목 좋은 곳에 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 휴일이면 나들이 인파가 바글거리는 궁평항이나 제부도를 지척에 둔 곳이다. 자연스럽게, 수월하게 구매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입지인 셈. 애당초 나들이객들이 오가는 길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터를 잡았더란다.

몸을 주로 쓰는 게 농사라지만, 머리라는 건 녹슬도록 마냥 놀려 먹이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차기설씨는 농원의 성장을 위해서는 일단 완전한 자연산 고품질 연 가공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철칙을 세우는 한편, 홍보에 주력했다. 연꽃축제를 매년 거하게 개최해 사람들을 유인했으며,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개설해 농원을 열심히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마음의 평온과 안락에 두었지만, 차기설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농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았다. 이는 지당한 실사구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바야흐로, 그의 농사는 성장세를 타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삶

“무슨 일이건 10년은 한 우물을 파야 빛을 본다죠? 농사도 마찬가집니다. 저희는 5년 만에 흑자를 보기 시작했지만 10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안정궤도에 접어들었어요. 그러나 통장을 보면 지금도 마이너스예요. 왜냐, 재투자가 계속되기 때문이죠.”

 

“귀촌이나 귀농을 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뭐죠?”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일 겁니다. 교류에 실패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일단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도시의 아파트식 사고를 빨리 버려야 해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와, 거의 완전히 오픈된 시골의 풍습은 매우 다르니까. 가령, 시골 노인네들은 이웃 사람이 외출을 할 때 꼬치꼬치 물어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딜 가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이걸 기분 나빠할 일이 아녜요. 노인네들은 이웃이 언제 돌아올지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그 집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가장 좋은 건 동네잔치를 가끔 하는 거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녜요. 국수를 삶아 함께 나눠 먹으면 되니까.”

 

“농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향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단연, 매우 게으른 성향의 소유자죠. 그런 분들은 아예 안 내려오는 게 정답이에요.”

“다소 게으른 건 미덕일 수도 있죠. 노력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일테면 유유한 태도 같은 거, 매사에 너무 악착 떨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거….”

“그걸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되겠죠. 제가 원래 매우 성미 급한 사람이었어요. 시골에 살면서부터는 많이 변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좀 생긴 것 같아요. 때가 되면 되겠지 하는 태도랄까. 천천히 자라나는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배운 덕이죠. 농작물만이 아니라 시골의 묵묵한 자연 순환이나 풍경들에서도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도시에서 사람의 삶이 초침(秒針) 단위로 돌아간다면, 시골에선 분침도 아닌 시침(時針) 단위로 돌아간다고 비유하고 싶어요.”

 

“연꽃의 매력은 뭐라 보시는지?”

“연꽃만이 아니라, 모든 꽃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막말로 성격 나쁜 사람도 꽃 앞에선 꽤나 순해지지 않던가? 저처럼 말이죠(웃음).”

시골의 산천 안에 살다 보면 유심히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슬쩍 열린다. 가만히 소소한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중에 굳었던 감관이 깨어난다. 이윽고 사는 일의 본연에 생각이 닿게 마련이다. 귀농으로 한결 느긋해지고 순해졌다는 차기설씨의 토설에 솔깃해진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박원식 소설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