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추(扇錘) 따라 풍류가 흐르네

 

 

초정(艸丁) 김상옥(1920~2004) 시조시인과의 인연은 19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처녀시집인 <초적(草笛)>을 구하기가 어려워 혹여 선생께선 몇 부 갖고 계실 듯해서 어렵게 전화로 여쭈니, 당신께서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한 것만 갖고 있다며, 꼭 구했으면 하셨다.

 

1947년 ‘수향서헌’에서 10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 이 책은 한지 바탕에 편집, 문선, 조판, 장정, 인쇄, 제본까지 저자 혼자 손수 한 출판 역사상 유일한 책이라 그 가치는 상당하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봉선화’ ‘청자부’ ‘백자부’ 같은 빼어난 시조들은 그 가치를 더욱 높인다.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의 서점가를 발로 뛰어 다니며 수소문하였다. 몇 달 후 진주와 대전의 고서점에서 <초적(草笛)>과 동시집 <석류꽃> <꽃 속에 묻힌 집>을 구해 우편으로 보내 드렸다. 선생의 시조를 읽으며 어휘와 음률에 대해 전화로 여쭈면 늘 반가워하시며 작품의 제작 동기와 발표 과정 등을 자상히 알려 주는, 길고 긴 시조강의(?)를 듣곤 하였다.

 

옥수동에서 압구정동, 그리고 이태원동으로 주소를 옮기셔도 통화는 이어졌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찾아오라고 하셨으나 왠지 문인으로 등단한 후에나 뵙는다는 치기로, 그리하지 못했다. 2001년에야 이태원동 청화아파트로 찾아뵈었다.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 생활을 하고 계셨는데 한낮부터 설핏 가을 해가 기울 때까지 문학, 고서화에서 시작된 말씀은 조선백자 예찬으로 장강을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서재 곳곳에 놓인 문방사우며 책들도 일일이 꺼내어 살펴보게 하셨다. 탁자에 놓인 벼루에 먹을 갈아 드리니, 준비해 가져간 책에 붓으로 서명을 하고 관지까지 해 주셨다. 선생이 지으신 책 중에 두 권을 빼고는 다 수집해서 소장하게 되었다. 그 후로 세 번 정도 찾아뵈었는데, “바쁠 터인데 이리 자주 오지 마라.” 단호하셔서 어렵기도 하고 문하(門下)가 아니라서 그리하시나 야속하기도 하였다. 그 어름에 합죽선(合竹扇)에 ‘성덕대왕 신종 명(銘)’을 전서(篆書)체로 써주셨고 구작(舊作)인 ‘벽도도(碧桃圖)’의 합죽선도 함께 주셨다.

 

 

 

 

千年碧桃如大斗 천 년 만에 열린다는 푸른 복숭아 큰 말같이 커서

 

仙人摘之以釀酒 신선이 이를 갖고 술을 빚어

 

一食可得千萬壽 한 번 마시면 천 년 만 년 산다네

 

庚戌春夜 於洌上 白瓷丹硏之室主人 艸丁 塗人掃毫 경술년(1970) 봄 밤, 한강 상류 ‘백자와 단계벼루가 있는 집’ 초정 그리는 사람이 붓을 쓸다.

 

 

중국의 시를 빌려 그림을 그리고 화제(畵題)를 썼다. 신선이 먹는다는 벽도 세 개와 무성한 푸른 잎사귀를 그리되 화제가 합죽선 끝을 따라 전서와 행서(行書)로 어우러져 가히 문인화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부채고리에는 은으로 된 팔각의 선추(扇錘)가 끈에 매달려 있었는데, 펴서 부칠 때 바람 따라 흔들리는 그 운치가 그만이었다.

 

이 인연이 합죽선을 수집하는 계기가 되어 한때는 여러 문사(文士)나 서화가의 글, 그림을 합죽선에 받아 100여 점을 갖고 있었으나, 은사님이나 선·후배 동호인에게 선물하고 30여 점만 남았다. 선추는 옥이나 은, 호박, 나무로 깎은 장신구들을 사북이라 부르는 합죽선 손잡이 고리에 매다는 것인데 침통이나 나침반 향갑 등 다양하지만 희귀해서 구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기록들에 의하면 쥘부채라고도 부르는 합죽선은 고려 때부터 실용되어 중국인들이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도 합죽선을 만들기는 했지만 대나무의 부챗살이 40~50개나 되게 만든 180도로 펼쳐지는 합죽선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물이다. 조선조에는 전주와 안동에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扇子廳)’을 설치, 부채를 진상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좋은 대나무와 질기고 우수한 한지의 생산에 근거했을 것이다.

 

합죽선을 만드는 스물네 공정은 까다롭고 세심해서 수백 번 장인의 손길이 공력을 들여 보름이 걸려야 한 자루가 완성된다. 단오 때가 되면 임금이 합죽선에 경구(警句)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옥 같은 백선에 좋은 글귀나 그림을 그려, 손에 들고 다니며 수시로 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마음의 뜻을 전하는 격조 높은 선물이었다.

 

국악의 소리꾼들은 꼭 합죽선을 들고 창을 한다. 격정적인 장면에선 접은 부채를 손에 탁탁 치기도 하고 부채를 180도 확 펴기도 한다. 이 소도구 하나만으로 아취가 있다. 한량(閑良)들의 춤사위는 이 합죽선이 더해져 완성도를 높인다. 반원의 합죽선이 허공을 가르며 추파를 일으킨다.

 

녹음 짙푸른 한여름, 정자에 앉아 선추 흔들며 시조 한가락 유장하게 뽑으면 가히 선인의 정취가 아니겠는가.

 

 

 

 

명실공히 현대 수채화의 제일인자라 칭하는 강연균(1940~ ) 화백의 그림들은 늘 사실적인 것에 기저를 둔다. 멀리 있는 것,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은 그의 그림에는 없다. 태어나서 자란 남도의 가난한 이웃들의 고단한 삶과 스산하고 보잘것없는 자연 풍광을 탁월한 스케치로 표현했다.

 

그가 수채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 비싼 유화 물감을 살 수 없는 아픔에 연유 되었다. ‘그가 겪어온 슬픔과 번민과 분노가 맑은 빛깔로 응결되어 있다. 그리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원초적인 아픔, 근원적인 아름다움까지 철저하게 파악하려 한다.’고 <계간미술> 1981년 봄호에서 평하기도 하였다.

 

1982년 누드 수채화만의 전시 작품이 모두 판매되는 등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수채화에 스며든 진실성을 모두가 아끼고 사랑한다. 백자 제기에 놓인 석류나, 눈 내린 좁은 비탈길, 광주리를 이고 초라한 굴뚝 옆을 지나는 아낙, 소녀의 비감어린 눈빛 등의 수채화를 수집하고 있던 중 인사동 경매에서 이 합죽선에 그린 ‘우시장(牛市場)’을 낙찰 받았다.

 

팔러 나온 소 서너 마리가 서거나 앉거나 한 사이로 함지박을 인 아낙이 지나고 촌로들이 소 값을 흥정하고 있으나 긴장감은 없다. 참외 수레 옆에는 팔려는 촌부나 강아지 두 마리도 졸고 있는 한가로운 여름, 시골 장터 한 모퉁이가 부챗살 따라 펼쳐져 있다. 전주의 부채 장인이 만든 이 큰 합죽선에 쌍어문(雙魚紋)의 대추나무 선추를 매달아 보았다.

 

향리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였다. 이미 그 세월도 50년이 넘었다. 몇 해 전 이러구러 소원하였던 옛 친구에게 ‘심월상조(心月相照)’라 서예가가 써 준 합죽선을 보냈다. 작은 은방울 선추를 매달아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속엔 서로 달이 비춘다는 고승(高僧)의 고상한 경지를 빌려보고 싶어서였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