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서양 나들이 (下) 사절단의 행적 미 대통령에 큰절 올린 외교단
조선은 1883년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조선에 부임한 데 대한 답례사절로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그런데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은 미국 체스터(Arthur Chester) 대통령에게 큰절을 하여 미국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국서를 전하면서 양국의 우호, 교역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조선정부에 대한 중국의 압력이 더욱 심해지면서 조선은 대외적으로 독립을 천명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미국에 외교사절 파견을 검토한다. 알렌의 일기에 의하면 “미국이 조선에 왜 이토록 무관심하냐?”고 고종이 묻자 알렌은 “공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고종은 1887년 7월 박정양을 미국 주재 공사로, 알렌을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한 뒤 한 달여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출발하게 한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좌)/이완용(우)
처음에는 중국이 박정양을 특명전권 공사 임명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이 이번 행차가 조선의 독립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중국에 알리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한다. 원세개(袁世凱)가 박정양의 출발을 방해하자 겁을 먹은 박정양은 출발을 위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두 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알렌의 주선으로 그 해 말 미국 상선을 타고 인천에서 비밀리에 출발한다. 출발 직전 이들을 체포하려 중국함선이 나타났으나 배에 미국 국기가 걸린 것을 보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중국에게 우리 외교사에 굴욕적인 약속을 한다. 소위 영약삼단(另約三端)이다. 그 내용은 ①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만나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조선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아래 자리에 앉는다 ③조선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등이다.
영약삼단은 조선이 추구한 독립국 지위를 완전히 망가트리는 것이다. 제1 조항은 외교관례에도 어긋난다. 외교관이 주재국 외교부에 신임장을 제정한 후 비로소 ‘공식’ 업무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양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중국 공사 장음환(張蔭桓)이 찾아와 자기의 안내를 받으라고 했다. 알렌은 중국 공사관을 먼저 방문하면 이것은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이 실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고종이 이 사실을 알면 박정양을 참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888년 1월 12일 아침 알렌은 중국 측의 방해를 우려하여 평소보다 일찍 박정양 일행을 깨워 국무부로 갔다. 다행히 중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로써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하려는 사절단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다고 알렌은 자평한다.
박정양 일행은 1888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팰리스(Palace) 호텔로 갔다. 그리곤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10여 명의 일행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은 방이었다. 그런데 이 방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행은 놀라고도 두려워 몸을 떨었고 외국 땅에서 자기들을 괴롭히려 찾아온 지진이라고 소리쳤다. 알렌은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설명했으나 이후 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항상 계단으로만 다녔다.
▲박정양의 문집 '죽천고(竹泉稿)'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큰절을 올리려 한 것이다. 이보다 5년 전인 1883년, 보빙사 민영익 일행이 체스터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렸다. 조선 ‘외교관’들은 미국 대통령이 중국 황제와 같이 용포를 입거나 아니면 최소한 다른 관리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의자에 폼 잡으며 앉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접견실에 들어가니 이 같은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박정양은 평민적이며 수수한 옷차림을 한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박정양에게 (아마도 알렌이) “이분이 대통령이요”라고 말하자 그는 절을 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이 사절단의 절을 막았다. 미국 대통령이 큰절을 받고 매우 당황하여 화제가 되었다는 글도 있는데, 이건 1883년의 사건을 말한 것이다. 절을 올리지 못한 박정양은 크게 당황하여 횡설수설이었다고 한다.
박정양 일행은 곧 워싱턴 정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위트니(William C, Whitney) 해군장관 부인이 베푼 리셉션에서 어깨와 목이 드러난 야회복(décolleté) 차림으로 춤추는 여자들을 보고는 벗은 여자들을 쳐다보아도 괜찮으냐면서 ‘미국 기생’들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알렌이 이들은 기생이 아니고 저명한 사회인사의 부인이나 딸들이라고 설명했다. 공사는 ‘이게 무슨 일인가, 옷을 입지도 않은 여자들을 여러 사람들 앞에 내세운단 말인가’라고 의아해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은 “떨고 있는 여자들에게 두루마기를 벗어 감싸주면 훨씬 따뜻할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벗은 여인들로부터의 충격에서 깨어난 박정양은 이 여인들과 말을 나누어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자 다가오는 여인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한 남부 출신 여성은 박정양에게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기 위해서는 남부를 여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조선공사는 근엄한 태도로 남부에는 미희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응대했다. 대통령과의 만남에서는 허둥대던 공사는 미인들과는 대화에서는 아무런 실수도 없었다.
그 뒤 최악의 사건이 터졌다. 시가(cigar, 여송연) 밀수 사건이었다. 알렌은 서울에서 여행 준비를 할 때 일행이 필요 이상의 짐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추측하고 샌프란시스코 세관에서 비합법적 물건은 없다고 서명했다. 그런데 6개월 후 뉴욕 헤럴드지에 밀수 기사가 터진 것이다. 박정양은, 알렌에 의하면, ‘가장 비굴하면서 비참한 모습으로’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외교관의 면세 특권을 이용하여 세 상자의 면세 여송연을 가져와 필라델피아에서 몰래 팔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한 수행원의 실수로 돌려 수습되었다. 여송연 사건으로 워싱턴에서 조선의 위신은 추락하고 원래 알렌이 고종에게 약속한 월가에서 차관을 얻는 것도 성사될 수 없었다 한다.
박정양은 워싱턴 공사관을 1888년 11월 대리공사 이완용에게 넘기고 12월 19일 일본 요코하마(橫浜)에 도착했다. 그러나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가 난 원세개의 문책이 두려워 동경 공사관에서 머물다가 다음 해 5월 서울에 왔다. 원세개는 중국황제와 조선왕의 명령을 위반한 죄인으로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1889년 8월 한직으로 좌천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글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