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 선생님의 닮고 싶은 건강 비결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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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MC 송해 추모 특집 방송 화면 캡처. ⓒ KBS
 

 

송해가 이끄는 ‘전국노래자랑’ 무대가 열리면 온 동네가 들썩였다.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꼬마부터, 랩송을 부르는 어르신까지 모두가 참여하는 잔치마당이었다. 송해는 ‘땡’ 소리에 탈락한 출연자들을 정겨운 입담으로 격려하고, 흥겨운 공연에는 어깨춤 장단을 맞췄다. 맛깔나는 만담을 통해 출연자들의 인생 스토리에 색을 입혔다. 때로는 구수한 사투리, 때로는 망가지는 몸 개그를 섞은 능청스러운 진행에 객석에서는 수시로 폭소가 터졌다. 한껏 무르익은 무대 위에서 숨겨져 있던 스타들의 끼는 아낌없이 폭발하며 ‘딩동댕동’을 이끌어냈다.

 

1980년 11월 첫 전파를 탄 ‘전국노래자랑’ 마이크를 그가 넘겨받은 것은 61세였던 1988년. 남들은 은퇴했을 나이에 ‘전국노래자랑’의 사회를 맡아 34년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난 6월 8일, 송해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송해 선생은 악극단 시절부터 코미디언, 가수, 방송인 등 만능 엔터테이너를 거쳐 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영원한 MC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변천사를 두루 경험한 큰 별이었다. 그 큰 별 하나가 지난 6월 8일 95세의 나이로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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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해 선생은 맛깔나는 만담을 통해 출연자들의 인생 스토리에 색을 입혔다. ⓒ KBS

 

선생이 100세를 눈앞에 둔 95세(1927년생)까지 건강수명을 누리고, 그 순간까지 일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것은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하다. 과연 송해 선생의 건강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 많이 걷고 많이 움직였다.

송해 선생이 생전에 밝힌 첫 번째 건강 비결은 버스(B)와 지하철(M), 도보(W)로 움직이는 ‘BMW’였다. 그는 서울 매봉역 인근 자택에서 ‘원로 연예인 상록회’ 사무실이 있는 종로3가역까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다녔다. 매일 아침, 저녁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다리의 근력을 키웠다. 기획사나 로드매니저, 코디도 두지 않았다. 지방 공연 때도 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KTX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 목욕을 생활화했다.

매일 오후 4시 사무실 근처 목욕탕에서 다리와 팔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체내 노폐물을 걸러냈다. 혈액순환과 면역증진, 그리고 피부 탄력에 좋다는 냉온욕을 즐겼다.

 

◆ 소화 기능이 남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먹은 것도 소화가 안 됐는데 선생님은 매끼를 정말 잘 드셨어요.”

“늘 ‘공평’을 중시하시더니 술자리에서도 서로 똑같은 양을 마셔야 했어요. 저도 술이 센 편인데 술을 마시다가 위기를 느끼게 한 유일한 분이 선생님이세요.”

선생의 식성에 대해 주변인들이 말하는 평이다.

 

◆ 치아 관리에 공을 들였다.

한 달에 두세 번 치과를 방문한 덕에 만년까지 빠진 이가 하나도 없었다.

 

◆ ‘영원한 현역’으로 일했다.

송해 선생은 70년 가까이 왕성하게 일했다. KBS ‘전국노래자랑’은 그가 환갑을 넘긴 1988년 5월 성주 편부터 사회를 봤다. 올해 5월에는 ‘전국노래자랑’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북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에 등재되기도 했다. 70년 가까이 현역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최장수, 최고령 MC로 남은 송해의 기록은 한동안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 

 

◆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 우리(연예인)가 없으면 사회가 재미없다”라며 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을 진행한 34년간 한결같았다고 주변인들은 전한다. 녹화 갈 때면 꼭 하루 전에 그 마을에 도착해 1박을 했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살폈다. 녹화 당일에도 3시간 전에는 행사장에 도착해 출연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 지나가는 소달구지를 보고 동네 아낙을 보고 하늘도 올려다본다”라고 했다. 현지 분위기에 푹 빠져들 때까지 공감과 소통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 팔도를 웃기고 울린 진행 솜씨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 많은 사람과 교류했다.

나이 들어 느끼는 고독, 외로움은 건강의 적이다. 노인의 우울감이 높아지면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다. 치매에 걸리기도 쉽다.

선생은 이런 고독, 우울감이 몸에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는 2,000원(최근 2,500원으로 인상) 우거지 국밥집, 5,000원 이발관 등을 자주 찾으며 주민들과 대화를 즐겼다. 주말에도 낙원동에 자주 나와 사람들과 어울렸다. 2018년 부인(고 석옥이·1934~2018)이 폐렴으로 별세한 후에는 토, 일요일에도 ‘출근’이 잦았다. 노인들을 위한 공연이 열리는 실버영화관 객석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무대로 불려 나가 노래 2~3곡을 부르곤 했다. 관객 중에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90대 중반 노인이 ‘후배 노인들’을 위해 노래 봉사를 한 것이다.

약주를 하느냐는 질문엔 “그거 빼면 사람이 심심해서 안 돼”, “술 한잔하면서 마주 앉은 사람은 다 행복한 친구”라 할 정도로 술 한 잔 기울이며 교류하는 것도 즐겼다.

 

◆ 즐거운 일상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숱한 슬픈 개인사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 100세를 앞두고도 젊은이처럼 일할 수 있는 것은 심신이 건강한 삶을 평생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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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7일)까지 낙원동 ‘원로 연예인 상록회’ 사무실에 출근했다. 인근 식당에서 청국장 백반으로 점심 식사한 후 지하철로 귀가한 다음 날 아침 목욕탕에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송해 선생은 누가 봐도 ‘딩동댕’ 삶을 살았다. 계속 움직였고 계속 만났고 계속 일했고 계속 웃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활동 중단과 건강 악화만 아니었으면 100세 MC 기록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연예계 후배들은 안타까워한다.

 

60세 이후의 삶도 건강하게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송해 선생!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50+시민기자단 구세완 기자 (swkoo02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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