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피티, 회색빛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다

 

2017년 7월, 그라피티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로 유명한 영국인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Banksy)의 작품을 모은 <뱅크시 코리아 서울> 전이었다. ‘길거리 낙서’, ‘불법 행위’로 보는 시선이 있어 쉽지 않았을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열린 <위대한 낙서> 전도 흥행에 성공하며 그라피티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줬다. 그라피티 작가들은 분사되는 스프레이를 통해 자유를 표출하며 때론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학적 그림으로 표현해 지적한다. 깡통 스프레이는 회색빛의 거리를 화려하게 변신시키고 흥미로운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전철이나 건축물의 벽면, 교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인 그라피티는 1960년대 필라델피아 갱단에서 자신들의 구역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됐다. 이후 뉴욕으로 퍼져 이름을 공공장소에 불법적으로 남겨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청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거리에서 화려하면서도 현란한 원색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뱅크시(Banksy), 키스 해링(Keith Haring),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 등 유명 작가도 배출됐다.

 

하지만 그라피티의 성지인 뉴욕에서도 그라피티는 여전히 불법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지하철역 환기구를 통해 침입해 전동차에 낙서한 외국인 4명에 대해 수배가 내려져 전파를 탄 사건이 있다. 지금도 허가받지 않은 공간에서의 그라피티는 재물손괴죄, 건조물침입죄를 적용해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 이처럼 그라피티가 공공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그림이 도시를 밝힌다는 긍정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그라피티는 종종 특정한 장소에서 작업되어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를 새롭게 조명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홍대 주위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새로 찾은 곳이 한강과 압구정을 이어주는 압구정나들목이다. 그라피티 작가들 사이에서 ‘토끼굴’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곳은 한강사업본부가 그라피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한 공간이다. 단 작업은 밤 10시 이후에만 가능하며 정치적, 선정적 이미지를 그려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늦은 밤이 되면 그라피티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벽 앞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뒤죽박죽 얽혀 알아보기 힘든 글자체를 사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그 옆에 이미지를 덧붙이기도 한다. 화살표, 따옴표, 비눗방울 등의 이미지는 마치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밑그림 위로 뿌려진 스프레이는 하나의 근사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압구정나들목을 자주 지나가는 박모(55)씨는 작업 중인 그라피티 작가들의 그림을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그라피티는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생각을 전달한다

“예전에는 색감도 어둡고 뾰족한 이미지만 있어서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은 화려한 색상에 재미있는 캐릭터도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죠. 그저 삭막하기만 했던 벽에 정기적으로 그림이 바뀌니 신선하고 좋았어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 아닌데 어떻게 완성되는 건지 궁금하고 신기했는데 오늘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네요(하하).”

알록달록하게 그라피티로 꾸며진 이곳은 자전거 동호회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김모(25)씨는 벽에 그려진 작품들을 훑어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곳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셔터를 누른다.

 

“여기서 자주 자전거 동호회 회원끼리 사진을 찍어요. 그라피티의 색감과 자유로운 느낌이 자전거와 잘 어울려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죠. 집주인 입장에선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노후 주택이나 운영하지 않는 건물을 방치하지 말고 그라피티로 꾸민다면 이곳처럼 주목받을 수 있는 장소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이런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SITCH라는 익명으로 활동 중인 한 작가는 “그라피티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욕도 먹는다. 그 와중에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다. 이런 경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생각했던 것을 스프레이로 뿌려 표출할 수 있고 그런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고 설명했다.

 

그라피티 작가 위제트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신선한 디자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 뜻밖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라피티 작가 위제트(좌) SITCH(우)

 

 

일반적인 전시회라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다가가지만 그라피티 같은 거리의 예술은 뜻밖의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라피티 작품 앞에서 만난 김모(51)씨는 “표지판이나 벽, 길거리에 뿌려진 알 수 없는 글자와 그림들은 공공시설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분위기와 더해져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며 그라피티를 공공시설을 해치는 길거리 낙서라고 표현했다. SITCH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이 익숙한 듯 입을 열었다.

 

“가끔 작업을 하다 보면 신고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냄새 난다’, ‘보기 좋지 않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등 다양한 이유로 말이죠. 우리나라에 허용된 공간이 별로 없는데 허용된 공간에서만큼은 우리의 작업을 열린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작업한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지워질 수도 있는 그라피티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예술의 세계를 전달한다. 최근에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비주류 문화로 인식되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피티 작가들은 부정적인 인식과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개성이 숨 쉬는 예술을 만들어낸다. 이제부터는 거리를 걸을 때 잘 살펴보자. 어쩌면 오늘 밤 남몰래 그라피티로 꽃단장을 마치고 다음 날 새로운 모습으로 반길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정지은 기자 jungje94@etoday.co.kr
사진 김수현 player0806@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