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에서 돌아보니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이 참 많습니다. 꽉 찬 삶을 내려놓고 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보기도 전에 떠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과의 사별이 남은 사람들 속에 자리 잡아 눈물보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요? 제 아버지는 떠나신 지 삼년하고 세 달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버지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육십여 년 동행을 잃은 어머니 앞에서는 태연해야 합니다. 가장 가깝고 오랜 친구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부추길 순 없으니까요.
일요일은 어머니를 만나는 날.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틈나는 대로 엄마를 만지작거립니다. 아버지는 가셨지만 엄마는 여전히 사랑받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전에는 ‘징그럽다!’며 손길을 뿌리치시던 어머니가 이제는 순순히 늙은 딸의 손길을 받으시니 감사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싸합니다. 이종문(1955- ) 시인의 시 ‘효자가 될라 카머’를 보면 어머니 만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 말고도 많을 것 같습니다.
효자가 될라 카머
--김선굉 시인의 말
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 카머
너거무이 볼 때마다 다짜고짜 안아뿌라
그라고 젖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
다 큰 기 와이카노, 미쳤나, 카실끼다
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시를 어루만지다>, 도서출판 b
시의 제목에 붙은 부제로 미루어 볼 때 이 시는 이종문 시인이 선배인 김선굉 시인(1952- )의 말을 듣고 쓴 시인 듯합니다. 시를 읽다 보면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두 시인이 그쪽 사투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쓱 읽으면 웃음이 나오지만 웃음 끝이 슬며시 젖어오는 건 어머니를 어머니이게 하는 모든 것들 때문이겠지요. 같은 시집에 실린 최하림(1939-2010) 시인의 ‘집으로 가는 길’도 어머니 얘기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
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
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
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
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
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 고요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
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 내 고요를
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부모님을 잃은 사람은 누구나 두 분이 남기신 ‘처연한 고요’를 압니다. 제가 아버지 돌아가신 후 부모님 댁에 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고요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고요만으로도 눈물겨우니 어머니까지 떠나시면 그 고요를 어찌 감당할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별은 최영미(1961- ) 시인이 노래하듯 우리가 피하거나 대비하기도 전에 ‘겨울이 가을을 덮’치듯 갑자기 찾아오겠지요.
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겨울이 가을을 덮친다
울긋불긋
위에
희끗희끗
층층이 무너지는 소리도 없이
죽음이 삶의 마지막 몸부림 위에 내려앉는 아침
네가 지키려 한 여름이, 가을이,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내일이면 더 순수해질 단풍의 붉은 피를 위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첫눈이 쌓인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
우리가 아무리 ‘지키려’해도 떠나가는 것들은 떠나가고 ‘죽음이 삶의 마지막 몸부림 위에 내려앉’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길과 길, 집과 집 사이를 떠돌 겁니다. 어쩌면 그건 윤동주(1917-1945) 시인이 ‘길’에서 노래한 ‘잃은 것’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겠지요.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미래사
부모를 잃고 고향을 잃고 친구를 잃고 사랑을 잃고, 그 모든 것을 담았던 시간을 잃고...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기에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는 우리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이 길을 벗어나는 날. 그날이 오면 어느 겨울 잃어버린 잎들을 어느 봄날 찾아내는 나무들처럼 우리 또한 잃어버린 그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날의 일은 그날의 일... 지금은 무엇보다 엄마를 만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