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재무설계’에 대한 요구가 부쩍 늘었다. 확실히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성큼 다가선 게 분명하다. 지금의 베이비부머 은퇴 세대는 부모를 부양했으나 자신은 부양받을 수 없는 첫 번째 세대, 60세에 은퇴하고 100세까지 사는 첫 번째 세대 등 많은 부분에서 첫 번째 세대로 불린다. 여러 의미에서 첫 번째는 선례가 없기에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 <서드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이라는 책에서는 은퇴했지만 아직 간병기가 오지 않은 건강한 노후 시기를 ‘서드 에이지 Third Age’라 명명하며, 이 시기에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드는 것이 지속가능한 생존에 관건임을 힘주어 피력하고 있다.

 

인류사에 새롭게 등장한 제 3의 인생 시기인 ‘서드 에이지’

 

그렇다. 100세 인생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 한 몸 아프기 전까지는 꾸준히 일하고 벌 궁리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60세 이후에 대체 무슨 일을 하란 말인가. 젊은 시절 열심히 일했으니 연금이나 받으며 손주 재롱이나 보며 그렇게 지내고 싶다고 해도, 남은 시간이 무려 40여 년. 재롱부리던 손주가 결혼해서 자식도 나을법한 시간이다. 사실 젊을 때도 현재 소득이 끊기고 나서 며칠을 버틸 수 있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힘없이 떨구는 사람이 많다. 누군가 경제적 의미의 자유란 ‘소득이 끊기고 나서도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의 수’라고 표현한 바 있다. 60세 언저리에 은퇴하고 나서 100세까지 무려 40여 년을 특별한 소득 없이 버텨낸다는 것은 단순한 산술 계산으로도 불가능해 보인다.

 

60대라서 일자리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20대도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다. 일자리가 부족할 땐 ‘창업’ 혹은 ‘자영업’을 도모하게 되어 있는데, 사실 은퇴 교육하러 다니면서 ‘퇴직금 창업’ 말리고 다니는 편이다. 제아무리 꿈같은 비즈니스 플랜을 외쳐도 현실에선 열에 아홉은 퇴직금만 날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평생 회사에서, 학교에서, 기관에서 주어진 일만 해왔던 사람이 갑자기 ‘창업’을 도모하게 되면 십중팔구 수업료를 내게 되어 있다. 내 부족함이 문제라기보다, 그저 모르는 분야를 거저 알게 되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노정된 시행착오에 대비하여 ‘몸 창업’을 권하는 편인데, 만약 식당을 오픈하고 싶다면, 식당 일 3년을 해보도록 권한다. 주방 보조에서부터 홀 서빙, 카운터 보기까지 전 업무를 체험해보면서, 주요 거래처 정보와 손님 응대 노하우 등을 체득하고 창업해도 늦지 않다. 체득 과정에서 ‘난 서비스업이 체질에 맞지 않는구나’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면 더더욱 괜한 창업 자금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있어 돈과 노후 여력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인생은 60부터’라며 거침없이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라고 독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100세 인생 시대 60대는 오히려 중년에 가까우므로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다만, 옛 라틴어 경구에는 ‘Qui Bono?’ 즉 ‘누구에게 이익인가?’라는 말이 있다. 인생이 60부터라는 말은 누구에게 이익인가? 누군가가 좋은 투자처가 있다거나,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나에게 열정을 독려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이익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몸 고생 하기 싫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취급받고 싶지 않아서 ‘프랜차이즈 사장님’을 하기로 결정하신 분들이 많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얘기가 되었지만, ‘프랜차이즈 창업’은 ‘내 자본으로 프랜차이즈에 취직하는 것’과 같다고 회자되곤 한다. 퇴직금과 함께 매장에 갇혀 버린다 해서 ‘깔끔한 감옥’으로 비유하는 사람들도 많다. 월급이나 제때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단 얘기다. 생각해보면 프랜차이즈는 그 브랜드가 손님 끌어 주고, 레시피 만들어서 납품해주고, 인테리어 정해주고 하니 일을 다 하는 셈이므로 당연히 많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말쑥하게 차려 입고 어디론가 출근하기 위해, ‘사장님’ 소리 들으며 존중받기 위해 감행한 투자라기엔 사실 지나치게 값비싸다.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일지라도 이미 확보된 그 돈을 내 노후 생활에 잘 쓸 수만 있다면 날리는 것보다는 무조건 나은 플랜 아니겠나.

 

 

젊어서 연금이라도 넉넉히 들어두면 안심이 될까. 인생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세컨드 에이지 Second Age’ 기간 동안 자녀 양육과 주거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도 돈이 부족하다. 물론 미리 다 준비하면 좋겠지만, 경제적 선택이란 ‘A and B’가 아니라 ‘A or B’다. 즉 둘 다 가질 수 없고, 매 순간 삶의 우선순위에 따라 한정된 재화를 배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울 땐 내가 혹시 둘 다를 가져야 한다고 고집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우선순위는 내가 결정하기 나름인 부분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자녀 양육이나 주거 안정은 노후 준비보다 먼저 온다. 노후 준비가 중요하지만 내 노후보다 부모님의 노후가 먼저 온다. 즉 먼저 오는 것이 중요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내 노후 준비는 뒤로 밀리는 경향이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미리 연금 준비를 하지 못한다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단 얘기다. 오래 벌 수 있다면 젊을 때 바짝 모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노후 생활자금을 위태롭게 하는 또 하나의 주범은 ‘노화에 따른 각종 질환’에 대한 염려다. ‘노화’는 자연현상일까, 질병일까? ‘100세 인생 시대 개막’은 ‘노화’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규정한 의료산업의 팡파레와도 같다. 평균수명 60세를 못 넘기던 시절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골다공증, 고지혈증, 뇌 및 심근경색 등이 대표적으로 ‘노화’가 ‘질병’이 된 사례다. 우리는 뼈에 구멍이 날 때까지, 피가 끈적해 질 때까지 살아본 적이 없었던 거다. 각종 기술의 진보는 자랑스럽게도 ‘노화’의 많은 이유를 올올이 찾아내고, 그것을 하나하나 ‘질병’으로 규정해내고 치료함으로써 수명 연장에 가열차게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돈이 더 많이 필요할 뿐이다.

 

 

1인 1암보험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성인들에게 <암과 싸우지 마라>라는 책을 쓴 방사선 암치료 전문가 곤도 마코토 의사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암에는 진짜암과 유사암이 있어 유사암은 방치해도 진짜암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진짜암은 현대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으니 수술과 항암제 치료를 받아봐야 고통만 가중시키고, 생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어느 쪽이건 수술을 하지 않는 쪽, 항암치료를 하지 않는 쪽이 고통이 적고 오래 산다.’ 정말 그런지 진실 여부야 각자의 신념과 판단의 몫이겠으나, 이 얘기대로라면 암을 걱정하느라 미리 지출하는 보험료 비용이나 실제 발병시 각종 치료에 들어갈 적잖은 비용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 비용만은 아닌 셈이다. 만약 곤도 마코토 의사의 말에 동의하여 암 걱정을 놓는다면, 암보험이나 암치료비가 덜 들게 되어 부족한 노후 자금 중에서 마음 놓고 삶의 질 향상 쪽으로 돌려 쓸 수 있는 자금이 확보된다.

 

단순히 질병의 치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안티에이징’ 산업은 매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건강보조용품이나 각종 미용시술 등을 개발하여 60~70대를 ‘청노인’으로 중년화시키고 있으니, 돈만 있다면 늙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은 기적이 눈앞에서 버젓이 행해지는 상황이다. ‘안티-에이징’, 나이듦을 막겠다고? 가능할까? 생로병사의 순리란 분명 상식인데, 그럼에도 이 얄팍하고도 뻔한 거짓말이 수천억대 ‘노화지연산업’의 핵심 모토로 버젓이 회자되고 있다. 좀더 젊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뭐가 나쁘겠나. 다만 ‘안티에이징’ 하느라 ‘웰에이징’할 돈이 부족하다는 게 ‘노후 재무설계’할 때 나타나는 비극일 뿐이다. 80세가 넘었어도 너무 젊고 건강한데 살아갈 돈이 부족하다면 수명 연장은 차라리 저주 아니겠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정해진 여력은 뻔한데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의 결정 앞에서 지속가능한 생존 문제가 과연 ‘선택사항’인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노화는 자연현상임을 받아들이고 ‘안티에이징’에 돈을 덜 들이면 ‘웰에이징’하는 여력이 좀더 늘어날 수 있게 된다.

 

노후 재무설계란 특별할 것이 없다. 그저 몸이 건강한 동안 몸으로 일할 궁리를 계속 도모하여 적더라도 꾸준한 소득을 창출해내서 몸이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할 때를 대비할 수 있다면 크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노화란 질병이라기보다 자연 현상임을 받아들일 줄 알고 ‘안티 에이징’하는 데 돈을 덜 쓸 수 있다면 그 여력 만큼 노후 생활비가 늘어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늙어감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느냐가 노후 재무 안정의 핵심이다.

 

<추천도서>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 윌리엄 새들러

암과 싸우지 마라 – 곤도 마코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