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엄마와 큰애, 나 우리 셋은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의 팔순을 기념해 떠난, 엄마와 나의 첫 여행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여행이었다.
올 봄 엄마의 팔순을 맞아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간단히 잔치를 끝냈지만, 내 마음엔 아쉬움이 남았다.
2017년 1월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한 달 남짓 요양원에 머무시며 남기신 메모이자 유언 중 하나가
“엄마를 존중하고 엄마의 뜻에 따르라.”는 내용이었다.
두 분이 평소에 그리 살갑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늘 엄마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셨다.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친척 집에 가신 엄마가 소식도 없이 막차 시간이 지나도 안 돌아오시자 아버지는 전화국을 통해 전화를 연결하던 복잡함을 무릅쓰고 친척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왜 전화했느냐고 귀찮은 듯 묻는 엄마께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소식도 없고 안 오니 걱정이 되서 연락했다.”고 대답하셨다.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게 내게 남아 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에겐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를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리고 평생의 반려를 잃은 엄마에 대한 애틋함도 커져 갔다.
나는 엄마의 팔순을 좀 더 폼 나게 축하해드리고 엄마와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엄마와의 여행이었다.
실행력 없는 탓에 생각만 하며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큰아이가 자신은 할아버지와 여행하고 싶었는데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며 더 늦기 전에 할머니와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평소에 가고 싶었던 일본 교토, 나라를 선택한 뒤, 여행지에 대한 책만 잔뜩 읽은 채, 아무런 계획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났다.
큰아이는 “엄마는 답사하듯 여행하는 사람이니까 가고 싶은 데 맘껏 다니시라며 자신이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겠다.” 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며 내가 몇 군데 못 가더라도 엄마와 시간을 보내겠다며 엄마가 좋아하실 만한 곳으로 방문지를 골랐다.
▲청수사(기요미즈데라)
첫날엔 아이의 추천지인 교토의 청수사( 淸水寺,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했다.
청수사는 교토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7개의 유적 중 하나로, 국보로 지정된 본당은 규모 면에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둘째 날엔 히가시 혼간지(同本原寺)와 히가시 혼간지의 별채 정원인 쇼세이엔(涉成園)을 보았다.
쇼세이엔은 한 시간 남짓 산책하기 좋은 정원으로, 사철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정원과 몇 개의 연못과 다리, 연못들에 면한 건물들이 아름답다.
에도막부 시대에 조성해 약 400년의 전통을 가진 정원은 일본 정원의 인공미보다는 우리나라 정원을 보는 듯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쇼세이엔
다음으로는 연못 위에 금빛 찬란하게 지어진 금각사(金閣寺)를 보고, 다음 행선지로 일본 국보 1호가 있다는 고류지(廣隆寺)로 향했다.
▲금각사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천신만고 끝에 고류지에 닿았다.
유홍준 선생의 말대로 고류지 남대문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새로 지은 박물관에 들어가 일본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을 영접했다.
불상들 사이에 자리한 반가사유상의 여유 있는 미소와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부처님은 역시 절에 다른 불상들과 함께 있어야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나 보다.
우리 반가사유상에 비해 섬세함과 조각 자체의 아름다움은 덜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류지는 도래인 진하승이 지었다는 절이다.
박물관에는 진하승 부부의 상이 다른 불상들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메이지시대 폐불훼석의 광풍 속에서도 몇 채의 건물과 불상들이 살아남은 것은 고류지의 역사성과 예술적 아름다움 덕분이 아닐까.
▲고류지 남대문
고류지를 보고 나서 우리는 나라(奈良)로 갔다.
나라에서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묵었다. 다다미가 깔린 다실과 침실, 부엌과 작은 정원이 딸린 아름다운 집이었다.
세 번째 날, 우리는 따로 여행하기로 하고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나는 도다이지(東大寺) 대불과 이월당과 삼월당을 보고 호류지(法隆寺)로 향했다.
▲도다이지 금당(좌), 도다이지 대불(우)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나라지역을 일주한 후 종점인 호류지 정류장에 닿았다.
호류지의 남대문에 서는 순간, 내가 그토록 그리던 호류지에 왔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익히 배운 호류지는 쇼토쿠태자가 발원하여 세웠다는 절답게 쇼토쿠태자의 상들과 백제관음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는 호류지의 5층탑과 금당, 그밖에 많은 건물들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주구지(中宮寺)에서는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전시한 세계 3대 미소라는 명성에 빛나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볼 수 있었다.
▲호류지 남대문(좌), 호류지 오층탑(중), 호류지 금당(우)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은 나라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호류지에 가면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부드러운 산세, 잡초가 무성한 논둑길, 무 배추가 심어진 텃밭이 마치 부여 어디쯤 와 있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호류지 부근 풍경
엄마와 아이는 이날 나라 시내를 구경했다. 마지막 날엔 오사카성을 방문했다.
천수각에 올라 오사카 시내를 내려다보고 성을 구경했다. 우리나라의 성과는 다른 일본의 성이 엄마는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이번 여행에서 어느 곳이 제일 마음에 드셨느냐고 물었더니 주저 없이 오사카성이라고 답하신다.
형태와 규모는 다르지만 우리나라 어디에나 있는 절이 엄마를 크게 사로잡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긴 유럽을 비롯해 동남아, 뉴질랜드까지 세상 이곳저곳을 여행한 엄마에게 일본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큰 감흥이 없는 엄마에게 “정말 재미없으셨느냐?” 물으니 엄마는 “늙으면 그렇게 감동할 일도 놀랄 일도 없다.”고 대답하셨다.
그럼에도 엄마는 외손녀와 딸 덕분에 일본 여행을 해서 좋았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오사카성 천수각(좌), 교토에서 조선학교 무상교육 촉구 캠페인을 보고 동참하는 기쁨을 누렸다.(우)
엄마는 10여 년 전에 두 무릎을 인공관절 수술을 하셨다. 그래서인지 여행 중에 숙소로 돌아오면 날마다 뜨거운 물로 다리를 마사지하곤 하셨다.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걷는 것도 엄마에게 힘겨운 일이셨던 것이다. 뒤늦게 온천을 한 군데라도 들려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내가 온천욕이 싫다고 팔순 엄마를 배려하지 못했다.
엄마의 팔순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보고 싶은 곳만 보았다.
참으로 이기적인 딸이었다. 엄마와 떠난 첫 여행, 속상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아쉬움도 크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 그 엄마 또한 나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와 딸이라는 이름으로 위로와 상처를 주고받은 우리들.
지금 이 순간,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부모자식 간에 이해하지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을 생각한다.
자식인 나는 엄마에게 섭섭함을 담고 있지만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용서하고 이해하지 않았을까.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내 아이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더 알게 되면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려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