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원을 보며 우리 문화를 본다
문화답사를 목적으로 국내 여러 문화예술 애호가와 단체로 일본이 자랑하는 가나자와(金澤)시의 정원(庭園) ‘겐로쿠엔(兼六園)’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일본 전통정원이 그러하듯 잘 정돈된 일본의 정원을 거닐던 한 동행인이 “왜 우리 정원은 일본처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했다. 많은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불평이었다[사진 1].
일본 전통정원이 ‘얄미울 정도’로 깔끔하게 가꾸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 정원의 나뭇가지는 정원사의 가위와 톱으로 두발(頭髮) 미용하듯 오밀조밀 예쁘게 다듬어져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손질로 가공한 조형물인 셈이다. 그래서 일본 정원은 바라봄의 대상이다. 교토시 료안지(龍安寺)의 정원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사진 2].
방문자가 정원 안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나 괴석(塊石)을 손으로 만지며 촉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마치 거대한 유리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긴장감마저 느끼게 된다. 일본 공영 방송사 NHK의 수석 디렉터인 후지모토 도시카즈(藤本敏和)는 “일본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살며 긴장감이 주는 아름다운 매력(Beautiful charm of tension)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반추하게 된다.
우리 정원은 일본 정원과 많이 다르다. 정원에 서 있는 수목(樹木)은 인위적 손질을 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물론 깔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또 바라봄의 대상이 아니어서, 정원에 들어가 나무에 기대기도 하고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시간을 갖기도 한다. 안식처로서의 정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원은 수더분하게 다가온다[사진 3].
이와 같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정원문화를 살펴보면서 필자는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도자기 예술에서도 같은 맥박을 느낀다. 일본 남단 가고시마(鹿兒島)현의 조선 도예가(陶藝家) 심당길(沈當吉) 집안의 14대손 심수관(沈壽官) 선생은 오래전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 도자기에는 정성을 다해 물레질을 하면서 대가를 생각하는 욕심(慾心)이 묻어 있고, 도공이 무심한 가운데 물레질하여 만든 조선의 도자기에는 무심(無心), 즉 불심(佛心)이 있다.” 또 “영국박물관의 조선 도자기가 있는 전시대 앞 카펫이 유독 마모되어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문화에 담긴 각기 다른 정신적 바탕에 대해 생각할 때면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간결함에 내재되어 있는 긴장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문화를 창조했다면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살아오며 엮어낸 ‘순수함의 문화’를 일궈냈다. 즉 일본 문화의 중추가 인위적이라면 꾸밈[假飾]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반면 가식을 배제한 우리 문화는 상대적으로 거칠게 다가오지만 자연을 거역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정직함이라는 더 큰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드높이며 자랑해야 할 심미안(審美眼)이다. 우리 문화의 높은 격조를 다시금 새롭게 돌아보게 된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