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 11월입니다. 이제 올해 달력도 마지막 한 장이 남았을 뿐입니다. 20대는 시속 20km로, 50대는 그 두 배가 넘는 50km로 세월이 간다더니, 나이 탓일까? 숨 가쁘게 달려온 2018년 한 해도 어느덧 역사의 저편으로 급속히 기울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화사하게 물들었던 단풍이 흩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즈음이면, 격동의 한 시기가 끝나고 그다음이 시작될 즈음이면 유난히 생각나는 야생화가 있습니다. 7월부터 피기 시작해 가을의 초입이라는 9월까지 고산 풀밭을 지키는 닻꽃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파란 하늘에 뜬 낮달을 향해 항해하는 듯 닻 모양의 꽃을 하늘 높이 매단 닻꽃. 닻을 올렸으니 분명 말달리듯 진군(進軍)하는 분망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 반대인 차분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왜일까. 아마도 하늘에 뜬 그 닻이 먼 길 나서려 막 올려진 게 아니라, 긴 여정 뒤에 찾은 쉼터에 내려질 닻으로 여긴 탓이겠지요.
꽃 모양이 배를 멈춰 세울 때 사용하는 닻을 닮았다 해서 닻꽃이란 이름을 얻었다는데, 실제로 꽃을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떡일 만큼 실감이 납니다. 식물체의 높이는 10~60cm. 연한 황록색으로 피는 꽃은 화관이 4갈래로 갈라져 아래쪽으로 길이 5~7mm의 원통형 뿔처럼 사방으로 뻗는데, 그게 배를 정박(碇泊)시킬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닻을 쏙 닮은 것이지요. 학명 중 종소명 ‘코르니쿨라타(corniculata)’도 바로 ‘작은 뿔 모양의’라는 뜻으로 외형을 잘 표현했습니다. 이런 생김새를 반영한 듯 ‘어부의 꽃’이란 꽃말을 갖고 있습니다. 봄철 피는 삼지구엽초도 꽃 모양이 매우 비슷해 닻풀이란 별칭으로 불립니다.
닻꽃은 그러나 2012년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돼 쭉 보호·관리 대상에 포함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보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야생화는 아닙니다. 7~9월 햇볕이 잘 드는 몇몇 높은 산의 풀밭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꽃을 피우는데, 이는 닻꽃이 북쪽에 고향을 둔 전형적인 북방계 식물임을 말해줍니다. 실제 2015년 7월 중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하는 안가라 강변에서, 그리고 올해 8월 백두산 인근 습지에서 누구의 각별한 관심도 받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 홀로 피어 있는 닻꽃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토(凍土)의 시베리아와 백두산이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본향이라는 말을 실감한 셈이지요. 한두해살이인 만큼, 한두 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뿌리까지 말라 사라집니다.
어쨌든 독특한 생김새 덕분에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누구든 처음 보는 순간 ‘아하!’ 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꽃 닻꽃. 높은 산 탁 트인 풀밭에 뿌리를 내린 닻꽃이 ‘천지간 바람 잘 날 없는 땅에서’ 수십 년간 치열하게 살아온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세대’에게 깊어가는 가을에 일갈합니다. ‘바쁘게 경쟁하며 앞만 보고 달리던 삶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을 위한 쉼터를 찾아 정주(定住)하라’고….
Where is it?
남한의 대표적인 고산인 설악산과 지리산에서도 자란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화악산(사진)에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생해 수도권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외 강원도 대암산과 한라산에도 자생하는데, 최근 한라산에서는 그 수가 크게 줄어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글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