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광운대학교 이홍 교수님이 세종대왕을 생각하며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당시에 비해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대왕님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걱정하시던 가뭄과 이로 인해 사람들이 굶는 일은 이제는 없습니다. 요새는 쌀이 남아돕니다. 국력도 한반도 역사상 최강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있습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저희들의 창의성과 관련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나라의 것을 베끼면서 잘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창의성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왔습니다. 창의성에 목말라하고 창의적 리더의 진짜 모습이 궁금하던 터 대왕님에 대한 기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세종실록이었습니다. 양이 너무 많아 모두 읽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제가 알고 싶은 것들은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요즘 저는 대왕님을 팔고 다닙니다. ‘세종에게 창조습관을 묻다’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왕님에 대해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지난날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대왕님을 실록에서 만나면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선 대왕님의 천재성과 통찰력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종 시대 창조물의 대부분이 대왕님의 머릿속에서 시작되었더군요. 조선의 천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 세상에서 가장 정밀한 해시계를 만든 것, 세계 최초의 다단계 로켓인 신기전(神機箭)을 개발한 것, 낮이든 밤이든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만든 것, 조선의 인쇄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 그리고 중국 음악인 아악과 조선 음악인 향악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대왕님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많은 창의적 생각이 어떻게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왔을까? 이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흥미진진한 탐험놀이와 같았습니다.

 

 

세종실록을 읽으면서 한 글귀가 뒤통수를 치면서 저를 혼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말로써 결정하지 않는다(不可以一人之言定之)”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왕님이 ‘허조’라는 신하와 대화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옳은 것처럼 보여도 한 사람(종류)의 생각만으로 결정하면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다른 사람(종류)의 생각도 들어보는 것이 옳겠다는 뜻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허조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대왕님 자신에게도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군주가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해도 군주 한 사람의 생각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허조를 통해 내비치셨습니다.

 

세종실록 어디를 펴봐도 대왕님의 이 생각은 여지없이 작동되고있었습니다. 이것이 대왕님이 보여주신 창의성의 원천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기가 막힌 원리를 사용하셨더군요. 바로 견광지(絹狂止)였습니다. ‘견(絹)’은 하지 말자, 다른 말로 하면 반대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광(狂)’은 한번 해보자, 찬성이란 말이겠지요. ‘지(止)’는 ‘쉬었다 하자’, ‘쉬면서 생각해보자’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 세 마디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편협하고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집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대왕님은 이것을 철저히 배척하셨습니다. “반대가 있어야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찬성파만 주위에 깔아놓으면 눈뜬 장님이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찬과 반이 부딪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찬과 반은 시끄러운 긴장을 낳습니다. 이 순간 대왕께서는 “쉬었다 하자” 하십니다. 서양의 창의성 이론은 이 시간에 생각이 숙성되고 통합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긴장감이 흐를 때 잠시 쉬다 보면 상대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원리를 도대체 어떻게 아셨을까요?

 

 

다른 의견을 가진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사고도 있었습니다. ‘고약해’라는 인물이 대왕님과 계급장 떼고 다투어보자고 한 일이 기억납니다. 자신의 의견이 대왕님과 다름을 참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무례한 신하에게 만류하면서 앉으라 하고 화를 참으시는 대왕님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고약한 사람 같으니”라는 말이 이 고약해에서 비롯됐다 하지요. 신하들과 토론하는 말미에는 “경의 생각대로 하시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이러한데 어떻게 생각하시오?”라는 지시적 토론을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대왕님을 이런 경지에 올라갈 수 있도록 했을까요?

 

더 놀라운 것은 대왕님의 인간적 향기였습니다. 좁은 소견으로 중국에도 대왕님과 유사한 천재적 왕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시황입니다. 치도(馳道),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와 유사한 마찻길을 전국에 깔았고, 중국말을통일했으며, 화폐 개혁을 하고, 오늘날의 국가 관료제와 유사한 군현제를 정착시킨 사람입니다. 그가 만든 무기들은 당대 최강의 것이었습니다. 진시황을 알면 알수록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왕님과 딱 한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불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조고라는 환관이 진시황의 오만을 이용해 자기세상을 만들어갔고 진나라를 멍들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총명한 첫째 아들 세자 부소가 죽임을 당했으며 급기야는 가장 미련한 막내 호해가 황제가 되면서 나라가 붕괴했습니다. 천재 끼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바로 오만인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랬습니다. 에디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대왕님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울까요?

 

대왕님에 대한 놀라움을 글을 통해 고백하면서 한편으로는 서글퍼집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서글픔입니다. 600여 년 전 나는 이렇게 했다 말씀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셨지만 우둔한 우리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선 창의성을 공부한다고 하는 저부터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용서를 어떻게 빌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한편으로 희망도 가져봅니다. 600년 전 한 분이 해보이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면서 대왕님이 몹시도 보고 싶었습니다. 

 

이홍 교수(광운대학교, 경영대학) bravo_lo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