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대한 회포

 

 

어느 누구도 치매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합니다. 65세 이상의 시니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치매라고 하니 마음이 착잡하고 무겁습니다. 어느 날 가족 중 한 사람이 치매 진단을 받는다면 큰 충격일 겁니다. 환자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혹은 부모님, 친구 등이 치매 환자가 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한 번쯤은 해보게 될 그 이야기를 동년기자들에게 들어봤습니다. <편집자 주>

 

 

 

 

 

 

 

 

 

 

후회 없이 살았으니 어떠한 미련도 없다

 

필자의 일가친척 중에는 치매 환자가 한 명도 없다.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만, 90세 이상 사신 분들도 꽤 있다. 그래서 치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가끔 깜빡깜빡할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근에도 사무실에 왔다가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온 것을 알고 다시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보니 이번에는 열쇠를 사무실에 벗어둔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고 왔다. 다시 사무실로 가서 열쇠를 꺼내 집으로 갔다.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휴대폰을 겨우 손에 쥐었지만 사실은 열쇠 가지러 다시 사무실에 갔을 때 집에 가져다 둬야지 하며 내놨던 짐 보따리를 또 잊고 나왔다. 이런 필자가 과연 치매에 안 걸리고 여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슬쩍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매우 꼼꼼한 성격이다. 여간해서는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책 내용을 까맣게 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다 보고 나왔는데 금세 스토리가 가물가물하다. 알코올성 치매도 염려된다. 평소에 술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과음한 날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1, 2차는 기억이 나는데 3차는 어디로 갔었는지 희미할 때가 있다. 위험 신호다. 그래서 되도록 독주보다는 막걸리를 고집한다.

 

지인들은 기억력 퇴화와 치매는 다르다며 필자의 경우를 기억력 쇠퇴로 정의해준다. 건망증 정도이지 치매 걱정은 아직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머리를 자주 쓰라고 조언한다. 필자의 블로그 활동은 그런 면에서 아주 바람직한 것 같다. 글을 쓰는 한 머리도 쓰게 되어 있다. 노래를 배우거나 춤을 추는 것도 뇌 활동 중 하나다. 당구도 그렇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술을 익히고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매가 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본격적으로 대책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관련 보험은 오래전에 들어놨다. 보험 모집원이 하도 집요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귀찮아서 든 보험이다. 새 대통령이 치매는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공약을 했으니 치료비 걱정은 안 한다. 그러나 치매에 걸리면 인생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우선 재산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동산, 부동산 관리를 아들에게 맡길 작정이다. 다행히 재원은 충분하니 경제적으로 아들딸 신세를 질 필요는 없다. 매년 연말이면 재산 목록을 컴퓨터에 업데이트해 한눈에 알 수 있게 해놓는다. 금융거래도 한 장짜리 종이에 정리해놓았다. 여차하면 컴퓨터 비공개 자료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만 가르쳐주면 된다. 요양병원 입원비를 충분히 떼어놓고 남은 재산은 아들딸이 반분해 나눠 갖도록 할 것이다.

 

필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을 만한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을 찾는 일이다. 요양병원, 요양원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면서 부실한 시설로 종종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대기자가 많다.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도 늘어날 것이다.

 

치매로 가족들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 믿을 만하고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 있다가 조용히 눈감으면 될 일이다. 치매를 앓게 되면 온전한 정신이 아니므로 병원에서 요구하는 잡다한 수술이나 연명치료는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어떤 형태로 장례를 치를 것인지, 장지는 어디로 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아들에게 부탁할 것이다. 한평생 해볼 것 다 해보고 후회 없이 살았으니 어떠한 미련도 없이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지낼 것이다. 미뤄뒀던 종교는 그때쯤 가져볼 생각이다.

 

강신영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조심해라, 조심해”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매일 엄마와 밥을 먹는다>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65세 아들이 10년째 치매에 걸린 92세 노모를 위해 매일 밥상을 차리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요즘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 벅차고 힘들다. 하지만 젊고 건강했던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처럼 ‘자물쇠가 있으면 반드시 열쇠가 있는 법’이니 힘든 면만 보지 말고 열쇠를 찾아보려 한다. 친구 몇 놈처럼 퇴직하고 ‘삼식이’ 소리나 들어가며 살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삼시 세끼 요리사가 되었다. 덕분에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고, 이렇게 책도 내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책을 읽는 동안 필자는 7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와 지낸 60여 년의 긴 세월이 매일 그립지만 마지막 5년만큼은 떠올리기가 싫다. 애처로운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대전으로 근무지 발령이 나서 주중엔 대전에서 지내고 주말엔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오곤 했다. 그렇게 주말 모녀로 몇 년을 살았다. 그런데 집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한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셨고 급기야는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치매 초기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기 전에는 조선족 아주머니를 간병인으로 채용해 하루 24시간 케어도 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점점 더 안 좋아지셨다. 여전히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식사량도 갈수록 줄었다. 아주 오래된 일은 기억하지만 며칠 전 일과 몇 시간 전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치매 증상도 심해져갔다. 결국 죽전의 한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2~3일에 한 번씩 침대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면 어머니는 늘 “조심해라, 조심해” 하시며 한마디를 잊지 않으셨다. “뭘 조심해요?”라고 물으면 “모든 걸 다 조심해야지” 하셨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정상적일 때나 치매를 앓으실 때나 어머니는 그저 자식 걱정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상하시고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함이 없었던 어머니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치매 환자가 되시다니…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가누기가 힘들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다 아쉬움뿐이겠지만 세상 떠나기 전 몇 년간 우울증과 치매로 고생하셨던 어머니를 좀 더 다정하게 대해드리지 못했던 것이 회한으로 남았다. 건강에 좋지 않은데 하루 종일 TV만 본다며 퉁명스럽게 말했던 일, 도우미 아주머니 옷주머니에 시도 때도 없이 만원짜릴 집어넣어주시던 어머니를 눈 부릅뜨고 힐책했던 일, 혼자 미장원에 갔다가 길 잃고 헤매다 늦게 귀가한 어머니를 큰 소리로 야단쳤던 일, 병문안 오신 외삼촌 얼굴도 못 알아보시는 어머니에게 툴툴거렸던 일 등등.

 

치매 환자로 누워 있어도 어머니가 곁에 있을 때는 든든했다. 오늘도 필자는 혼자 쓸쓸히 저녁밥을 먹는다. <나는 매일 엄마와 밥을 먹는다>의 저자처럼 하루 세끼 함께 밥 먹어주던 어머니가 필자에게도 있었음을 기억하며….

 

김수영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오늘의 나는 어제 먹은 음식

 

1998년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변호사가 치매를 앓는다는 사실을 알고 필자는 탄식했다.

‘여성들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해 평생 헌신하신 분에게 이런 병이 오다니… 누구보다 두뇌활동을 열심히 한 분도 피해갈 수 없는 질환이란 말인가….’

머리를 잘 안 쓰는 사람들이 치매에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필자는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치매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오는 병 같다. 필자가 평택에 살았을 때 아래층 70대 할머니가 그랬다. 자녀들이 분가한 후 홀로 지내던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한 미모 했을 것같이 고왔고 말도 자분자분 조용히 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하고 어울린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고 집 안에서 혼자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고 갔다.

 

필자와 인연이 있는 서울농대 농화학과 P교수님도 치매를 피하지 못했다. 40대 후반 무렵 교수님 댁에 놀러갔을 때의 일이다. 사모님은 P교수님이 퇴직한 후 유럽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사진 속에서 교수님과 사모님은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와우! 사모님 부러워요. 완전 잉꼬부부시네요!”

물색 모르는 필자가 감탄하자 사모님은 웃으면서 P교수님이 알츠하이머병이 와서 손을 꼭 붙잡고 다닌 거라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손을 놓으면 아무데나 막 가버리셔서 잠시라도 손을 놓을 수 없었어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던 날들이라서 서둘러 유럽여행을 떠났지요. 즐거워야 할 여행이 얼마나 쓸쓸하던지….”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1970년대 필자가 농대 학과장실에 근무할 때 학생지도위원이었던 P교수님이 가끔씩 들리셨다. 방문 여는 소리만으로도 P교수님이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문을 유난히도 씩씩하게 열어젖히셨기 때문이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분이 치매에 걸리다니… 인생무상이 이런 것인가 했다.

 

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치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질병이다. 치매는 진행 속도를 줄일 수는 있어도 완치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병이 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

 

치매가 올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자에게는 있다. 뇌가 여러 번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8세 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심각한 생각에 빠져 걷다가 전봇대에 엄청 세게 부딪혔었다. 55세 때는 바위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었다. 요즘은 잠의 질이 형편없다. 꿈을 꾸다 깨어나는 일이 많아 머리와 몸이 무겁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심히 걱정스러웠는데 때마침 치매예방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 강남시니어 플라자에서 치매 테스트를 받아봤다. 그 결과는? 필자도 놀라웠다. 30점 만점에 30점이 나왔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 먹은 음식.’

이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아침마다 디톡스 주스 한 잔에 사과 한 알, 현미 잡곡밥에 굴 미역국이나 시금치 된장국 등을 먹으며 건강한 밥상을 차리려 노력한다. 먹거리에서 오는 리스크만이라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모델워킹을 하고, 왈츠를 추고, 서울 둘레길 걷기를 한다. 오늘도 필자는 많은 사람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치매가 가까이 올까봐 경계하며 살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bravopress@etoday.co.kr

 

 

 

 

 

 

 

돌보는 가족도 환자로 만드는 가족병

 

1994년 11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국민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습니다. 앞으로 나는 나의 친구, 내 가족을 몰라볼지도 모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인생의 황혼(黃昏)으로 가는 여행을 떠난다”는 말과 함께 10여 년간 치매와 싸우다 2004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옆을 지켰던 부인 낸시 레이건은 치매 환자 가족의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천천히 분해되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괴로움”이라고 표현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낸시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며칠 전 필자는 초등학교 가을 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열두 살 꼬맹이였던 친구들은 60대 환갑이 넘은 초로의 모습이었다. 주름진 얼굴, 서릿발 내린 흰머리 등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웃고 떠들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부모님 안부로 이어졌다. 우리 나이가 육십이 넘었으니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도 많고 살아 계신다 해도 90세 전후라서 어르신들 건강이 좋지 않다. 집에서 치매로 고생하시거나 요양원에 계신 분도 꽤 있다.

 

자연스러운 치매 얘기에 경험담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치매 환자가 있으면 가족은 비상이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주방에 가스레인지를 켜놓는 등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치매 치료제는 없고 지연시키는 약만 있으나 그 효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최선책은 조기진단과 예방법 실천이다. 알려져 있는 예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햇볕을 많이 쬔다. 오메가-3 지방산과 비타민D 섭취량을 높인다. 둘째, 오메가-3가 풍부한 등 푸른 생선을 많이 먹는다. 셋째, 숫자나 퍼즐 게임, 낱말 맞히기, 산·강 이름 암기 등 두뇌를 쓰는 게임을 한다. 넷째, 당분 섭취를 줄인다. 다섯째, 잠을 7시간 이상 충분히 잔다. 여섯째, 항산화제가 풍부한 커피를 하루 3~5잔 마신다. 일곱째, 스트레스를 낮추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명상을 생활화한다. 끝으로 취미, 모임 등에 자주 나가 사회활동을 한다.

 

이미 치매가 시작되었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청해 등급 판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구체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지원 내용에는 방문 간호, 주간 보호, 단기 보호, 복지 용구 지원 등이 있다. 경증 환자를 위한 주간 보호 시설도 어린이집처럼 운영된다. 중증 환자는 24시간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요양원 입주가 가능하다. 현재 중증 환자의 경우 본인 부담금이 20%인데 ‘치매 국가 책임제’로 정책이 전환되면서 10%만 부담하면 된다.

 

필자의 장모님도 등급을 받아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신다. 요양원이 싫은 사람은 간병인을 구하면 되지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요양원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각종 프로그램과 전문가들의 도움이 있어 집에서 갇혀 있거나 누워만 있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치매는 본인뿐 아니라 돌보는 가족도 환자로 만드는 가족병이라 한다. 평소 예방법 등을 실천해 치매가 오지 않도록 하고, 주기적인 검진으로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고, 치매 관련 제도를 활용해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야 한다. 또한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환자가 한 생애를 끝내고 황혼 여행을 잘 떠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돌봐야 한다.

 

박종섭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블로그를 하는 이유

 

늦은 시간 가끔 현관 키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여러 조합의 숫자를 몇 번 입력해도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문을 두드리자니 주변에서 시끄러워할 것 같고 전화를 하자니 늦은 시간 잠든 가족을 깨우게 될까봐 망설여진다. 이런 일이 발생한 뒤 휴대하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현관 비밀번호를 적어뒀다.

그런데 현관 비밀번호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기억해야 할 숫자가 너무 많다. 그래서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숫자를 저장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가족과 지인들의 전화번호 수십 개를 외우고 다녔다. 심지어는 노래방 애창곡 번호까지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숫자는 단순화되고 기호화되었다. 이를테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 때 휴대폰 번호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든가 단축번호 ‘1’을 누르면 자동으로 전화 연결이 되는 식이다.

 

이렇게 환경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아날로그식으로 숫자를 기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그 결과 기억력이 점점 더 쇠퇴하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다. 언젠가는 현금영수증을 발급받으려다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포기한 적도 있다. 필자는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아 여러 정보들을 컴퓨터에 저장해두었다. 물론 컴퓨터 드라이브도 믿지 못해 블로그에 저장해둔 정보도 있다. 타인이 검색하지 못하도록 차단해놓은 블로그 방에는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휴대폰을 분실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가족과 친지의 축일도 저장해뒀다. 각종 사이트 아이디와 패스워드, 신용카드의 번호, 은행계좌 비밀번호도 모아두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컴퓨터 앞에서 난감한 일이 벌어진다. 사이트의 패스워드를 잊어버리는 경우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사이트에 접속하지 못하면 저장해둔 정보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치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이트 접근이 차단된 상태가 치매와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치매 환자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정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병이 깊어지면 자신에 대한 정보도 다 잃어버린다. 어느 요양원 원장은 치매가 환자 자신에게는 그리 나쁜 일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치매 환자를 봐왔는데 정작 환자 자신은 참 행복해 보이더라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것은 건망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면 치매가 올 수도 있다. 만약 치매가 발병한다면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생 정보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 수단 중 하나로 블로그 활동을 열심히 한다. 블로그에는 몇 개의 방이 있다. 가족 이야기, 친구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진 등 이런저런 자료가 거기 다 들어 있다. 자서전에는 다 담을 수 없는 정보들이다. 그동안 올린 포스트가 2000여 개다. 개인의 인생 정보가 담긴 거대한 저장소인 셈이다. 치매가 의심될 때 필자는 아내에게 이 저장소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넘겨줄 작정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한 손에 읽던 책 들고 자는 듯 떠나고 싶다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의 재회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 혹시 상대를 못 알아볼까봐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자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니가 대학생이고 필자가 중학생일 때 이문동 주택에서 월세를 산 적이 있다. 우린 별채에 살고 주인은 안채에 살았다. 작은 정원에는 철 따라 꽃이 피었다. 청신한 봄이면 유난히 라일락꽃이 탐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창문 가까이에 핀 꽃은 가난했던 우리 자매의 방을 향기로 가득 채워주곤 했다. 첫사랑이라는 꽃말처럼 우리의 꿈을 키워가며 설레던 시절이었다.

 

안채에 사는 주인집 아저씨는 월남한 사람이었는데 자녀가 아들 넷, 딸 하나였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신앙심 깊은 가정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정갈한 모습에 세련미까지 갖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가족이 성가를 부를 때면 아들들은 테너와 바리톤, 딸은 알토, 어머니는 소프라노로 멋진 화음을 들려줬다. 경외감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는 이북식 김치밥을 주발에 그득히 담아 건네주시곤 했다. 김치와 고기를 듬뿍 넣은 따끈따끈한 밥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그때처럼 맛있는 김치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

 

옛 추억을 더듬던 우리는 이제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 자매는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에 만난 둘째 아들에게 아주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뵈올 수 있기를 잔뜩 기대하며 현재 어디 사시는지, 건강하신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해하며 어머니가 치매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시니, 그때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엉망으로 변해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 자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치매. 인간에게는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인 마무리를 방해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치매가 예견된다면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남은 삶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배우자나 자식들은 남의 이목을 의식해야 하고 평판을 염려해야 하고 경제적 손실도 고려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면 좋겠다. 산 자들이 종종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할 수 있으려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치매가 깊어 회복할 수 없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듯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치매 집단시설도 가족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지 환자를 위한 공간은 아니다.

 

죽을 날 기다리며 남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은 최악이다. 필자라면 한 손에 읽던 책을 든 채 자는 듯 죽고 싶다.

 

이경숙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어쩌다 치매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를 찾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20대 초반쯤 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사택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담 너머로 무심코 눈길을 돌리던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무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은 짐승우리 같은 곳에 발가벗은 사람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오물을 벽에 칠한다는 치매 환자임을 알게 됐다. 가족은 농사를 지으러 논밭으로 나가야 했기에 환자를 집 안에 둘 수 없었다고 한다. 치매와 관련해 필자가 기억하는 첫 장면이다.

 

필자의 친구 부부는 둘 다 6·25 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신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덜컥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사돈은 왜 우리 집에서만 사냐고, 다른 자식은 없냐며 타박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아들 옆에 붙어 잔소리를 해대는 시어머니가 서운하고 미워서 저녁이면 친정어머니와 놀이터로 가서 도리도리 짝짜꿍 놀이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 친정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어머니를 차마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마음의 병을 주는 게 바로 치매다.

 

도봉구에서 만난 한 수강생은 자기 어머니가 예쁜 치매에 걸렸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대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사극치매에 걸린 노인도 있다고 한다. 며느리가 외출 후 집에 들어오면 공손하게 “마마,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하게 묻는단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네 이년!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하며 며느리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사극치매.

 

한 노인은 돼지고기를 볶아 맛있게 저녁을 먹고는 아들이 퇴근하자 며느리가 밥을 안 줘 배가 고파 죽겠다며 악을 썼다고 한다. 치매는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모든 층의 버튼을 누르고 모르는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삿일이다.

 

90세의 한 노인은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필자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내가 치매 환자인데 돌봐야 할 시간이라며 서둘러 집으로 갔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당신 곁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단다. 자서전이 내일이면 나올 날이었는데 노인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3일 후 그의 아내는 자식들에 의해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치매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갑이 지나고 보니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지인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려 모시고 갔는데 그곳 직원들을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기억을 잃어가도 생존 본능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84세의 친정어머니는 아직 맑은 정신을 간직하고 계시지만 치매를 떠올리면 불안감이 밀려온다. 사회적 고립감이 치매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자주 드린다. 어머니를 만날 때는 앨범, 빨간 내복, 반짇고리, 어머니께 사다 드린 옷과 목도리, 형제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이벤트를 한다.

가족의 사랑만이 치매를 예방하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만약 필자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기도 싫다. 우선 고혈압과 당뇨에서 풀려나야겠다. 그리고 살도 좀 빼야겠다.

 

장영희 동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