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가을이 우리 곁에 있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축제도 풍성한 계절이다. 그러나 이내 단풍색이 짙어지고 낙엽이 길바닥에 뒹굴면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우수에 잠길 것이다. 더불어 한 살을 더 먹는 것은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을 보내야 하는 일도 더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연로하신 시부모님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요즘 이사준비를 하며 버려야 할 물건이 너무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무엇에 홀려 이 많은 것을 이고지고 살았던가에 대한 생각이 많다. 때로는 부질없지만 이 많은 것들은 한 때 나에게 소확행을 안겨다 주었다. 더군다나 정든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 아쉬움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는 다시 이 집에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니 한 편으로는 후회가 되고 새삼 떠나려는 집이 더 좋아 보인다. 하물며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일본 영화 <굿바이:Good & Bye>의 주인공 <다이고>는 토쿄에서 첼리스트 활동을 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악단의 해체로 실업자가 된다. 할 수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구직을 한다. 고소득 보장이라는 벽보를 보고 여행사인줄 알고 지원한 곳이 오쿠리비토 즉 인생의 마지막 여행(다비다찌)길로 보내는 염습과 납관(엔케이) 일을 하는 곳이다. 고별식과 화장에 이르기까지 영화에는 잘 표현되지 않은 밤을 지새는 쯔야라는 일도 한다.
우리나라처럼 일본 사회도 납관하는 일에 대한 편견이 있어 모든 것이 낯설고 적응하기 쉽지 않다. 처음 마주한 일은 사망한 뒤 2주가 지난 고독사한 부패한 시신이다. 벌레가 득실거리는 시신에 다이고는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선임 납관사는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마지막을 보내준다. 그에게는 고인에 대한 진정한 예의가 있다. 집에 돌아와 식사도 못할 정도의 충격은 심했지만 다이고는 점점 고인에 대한 예의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주변은 만류한다. 아내도 불결하다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0724
이후로 젊은 중년 여인, 여고생, 초등학생 등 젊은 사람을 보내는 일도 한다. 누구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일을 그만두려고 선임 납관사와 대화를 하지만 마음을 돌이키게 된다. 그의 진심과 철학을 알게 되었기에 외면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된다. 힘들게 임신한 아내와의 화해도 하게 된다.
일에 어느덧 적응되어 여러 고인을 보내는 일에 대한 소중함을 알아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불륜으로 30년간 집을 나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그동안 디아고는 아버지의 진심을 알지 못한 채 응어리 진 마음으로 지난날을 보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은 디아고가 준 돌을 꼭 쥐고 계셨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다. 정성스럽게 염습하며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그 돌을 뱃속의 아이에게 갖다 댄다. 결국 그 돌은 아버지와의 화해와 사랑과 뱃속의 아이와의 대화로 연결된다.
이 영화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사람을 보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하는 영화다. 장례문화에 대한 편견과 터부시하는 문화에도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한다. 아버지와 주인공을 연결하는 돌 편지도 인상적이다. 반질(안심하라)한가, 거친 돌(걱정하라)인가로 마음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던 시절의 대화법이다. 아버지의 독특한 표현법은 표현이 부족한 우리의 아버지들에게도 좋은 대안이 될 것 같다.
굿바이의 원작은 <캐롤라이나 관 남편의 일기(의 아오키 새로운 문) >다. 휴머니즘으로 끝나는 엔딩을 원작자는 허락하지 않아 조금 다르게 각색된 영화다. 장례식과 관련해서 이타미주조 감독의 <장례식>이라는 1984년의 일본영화도 있고 한국의 1999년도 장문일 감독 <행복한 장의사>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는 때로는 많은 것과 이별해야 한다. 물건도 사람도 집도...... 원작자는 죽음에 대해 <새로운 출발>의 의미를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다. 아쉬움과 슬픔을 간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굿바이 감독은 영어의 포스터를
퀴블로 로스는 죽음에 5단계가 있다고 했다. 즉,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등의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 티벳 사람들은 흙이 물로, 물이 불로, 불이 바람으로, 바람이 의식 공간으로 해체 되는 등등 8단계의 과정을 복잡하게 거쳐 간다고 보았다.
인도 출신 의사인 아툴 가완디가 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이 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며 만난 수많은 환자들의 마지막 생을 겪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더불어 자신의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도 지켜보며 늙음, 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결국 언젠간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건강할 때 이별하는 연습이 필요하고 삶의 유한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는 서술했다.
우리는 당연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즉, 우리의 노화와 죽음에 대해 어떻게 더 지혜롭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다양한 50+동년배 활동을 통해서도 깨닫는다. 한 커뮤니티의 회원은 봉사를 하며 자신이 어떻게 나이 들것인가에 끊임없이 도전받는다고 했다.
스웨덴인은 나이 드는 걸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 들수록 아집과 편견과 욕심을 놓지 못하는 노인으로 변하는 경향이 많다. 지하철에서 예절이 없는 어르신들을 종종 대할 때면 <나이듦>에 대한 교육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어르신대학 교회 봉사를 하는 어느 날 사회자가 “가장 멀리서 온 사람을 상품을 주겠다.”고 하니 저의 주변에서 “제주도에서 왔다고 그래”라는 말이 들린다. 제주도 어디냐고 하니 미처 대답하시지 못했다. 결국은 상품을 수령했다. 무척 좋아 하신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 봉사할 때 빈손으로 가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 어르신 안부상담 전화를 하던 어느 날 “나 오늘 기분 안 좋아.”라고 하셔서 이유를 여쭈어 보니 “다른 사람은 휴지를 다 타갔는데 나는 못 받아서 속상해”라 하셨다. 남들이 받는 것을 못 받으면 속이 상한다. 비록 그 물건이 필요 없을지라도 정도의 문제다. 스마트폰 커뮤니티에서 봉사하셨던 한 동년배는 어르신 봉사를 하노라면 대체로 화를 잘 내신다고 한다.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전한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늙을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모으고 늘리고 확장하려 애썼던 세월이 분명히 부질없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 수많은 짐들을 이고지고 살았던 지난날들을 버리고 욕심 없이 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죽을 때까지 또 다른 욕심으로 나를 메우려 할 것이 뻔하다.
그래도 떠나보내야 한다. 나이 들어 이사하면 고생이라지만, 정리의 계기가 되어 참 좋다. 추억이 없는 것 먼저 하나씩 보내고 있다. 원 없이 기증도 한다. 이사를 통해 미래의 간소한 삶을 준비하는 1단계에 돌입했다. 물건을 통해 사랑하는 많은 것들과 이별을 연습하는 느낌이다. 그것들에게 “굿바이”를 외쳐본다.
낡고 때가 묻어도 추억이 어리고 떠나보낼 수 없는 것들은 어떻게든 부여안고 가려는 자신도 발견한다. 그러나 버리다 보니 점점 과감해지는 경향도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 간 것이니 부여잡지 말자고.
만감이 교차한다. 언젠가는 사람과도 이런 이별을 하겠지. 살아가는 동안 “굿바이”라고 말하지 말고 “사랑해”라는 말을 더 많이 하고 마지막을 아름답게 굿바이 하기를 꿈꾸어 본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함께>
함께 사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함께 늙는 것도 기쁘다
함께 늙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함께 죽는 것도 즐겁겠지
그 행운이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밤마다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출처: 사랑은 시가 되고 이별은 별이 되는 것, 예닮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