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정신없이 바삐 살게 했던 자식들이 3년 전, 한 해에 둘 다 모두 독립해서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 해에는 수십 년간 해왔던 일을 그만두었다. 홀가분하고 해방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허구한 날 여행을 다닐 수도 없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떤 날은 너무 할 일이 없어 미칠 것 같았다. 어떤 때는 하도 심심해서 우리에 갇힌 곰처럼 집안을 뱅글뱅글 돌아다니기도 했다. 인생의 제일 괴로운 일은 ‘한가한 것’이라고 했던 중국 명대 학자 왕양명의 말이 온몸에 절절히 와 닿았다. 그렇다고 돈 버는 일과 집안 일로 매어 살았던 지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퇴직을 하였거나 아이들이 결혼을 한 50+세대에겐 혼자 보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혼자임을 견딜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돈 벌려고, 일 하려고 태어난 세상은 아닌데...... 그리고 잘 놀아보지 못한지라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제 이 시간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막막했다. 할일이 없었다. 그러나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안 찾고 못 찾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시행착오를 거쳐야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 돈은 필요하지만 우리 시기는 일과 돈만을 위해 보내는 그런 시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세월은 빠르지만 하루는 더디 간다
‘오늘은 뭐하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질문을 할 필요조차 없이 내 앞에는 해야 할 일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딸과 며느리, 아내와 어머니, 직장인으로 바쁘게 살아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한 일들이었지만 때로는 숨이 막혀 벗어나고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추수를 끝낸 후에 빈 들을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어쩌면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살다가 문이 열려 방금 빠져나온 새가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은 빠르지만 하루는 더디 간다. 그래서 인생은 짧게도 느껴지고 길게 느껴지기도 하나보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일할 때와 쉴 때가 있듯이 말이다. 50+세대인 우리는 지금이 어느 때일까. 책임과 의무로 점철되었던 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나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때이거나 그 때로 옮겨가고 있는 때가 아닐까. 환절기에 병이 생기기 쉽듯이 생의 전환기에 왜 진통이 없겠는가.
진정한 나를 찾아 새로운 탐험에 나서자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헤비거스트(R.J. Havighust)는 한 개인은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라는 6단계를 거치며 일생을 사는데 각 시기마다 이루어야 할 숙제가 있다고 했다. 그것을 발달과업(development task)이라고 명명했다. 한 시기에서의 과업을 잘 이뤄내면 행복하게 되어 다음 단계의 과업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돌이 다 된 아기는 두 발로 일어서고 한 두 걸음을 걸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걷기는커녕 고개도 못 가눈다면 다음 단계인 뛰어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50+세대에게 주어진 과업은 무엇일까? 먹고 사는 문제가 여전히 시급한 사람이거나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이 물음에 답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가정적 책임과 의무를 어느 정도 마친 사람은 '오늘은 뭐하지?' 라는 질문과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은 이전의 시기를 잘 건너왔다고 볼 수 있으니 그런 자신을 잘했다고 먼저 쓰다듬어 주자. 그리고 그 힘들었던 세월을 버텨내며 여기까지 왔으니 그 위대함으로 이제는 진정한 나를 찾아 새로운 탐험에 나서자.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도 있고 함부로 도전하지도 않는 신중함과 지혜도 있다. 그러니 할 만한 것을 찾고 시도해보면서 새 길을 열어간다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시간들을 채우면 된다. 전 세대들의 삶이 교과서가 되어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좋겠지만, 우리 세대는 수명이 늘어나고 사회가 급변하여 윗세대의 족적을 참고하기 어려운 세대이다. 또한 새로운 일상이 요구되는 뉴노멀(New Normal)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 앞에 놓인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가야 품격 있는 노후가 될지를 찾아가는 일이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업이겠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100세 나이에도 사회적 활동을 하는 김형석 교수는 인생의 황금기가 6, 70대라고 했다. 그리고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한계가 없으므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물으며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제는 가족이라는 범주를 넓혀서 이웃을 위해 활동하여 보람을 얻고, 영혼을 위한 진리를 찾으려 하는 일이 우리 세대 앞에 놓인 과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입을 것, 먹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족할 줄도 알아야겠다. 각자의 경제 형편에 맞추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하고, 가지고 있는 돈과 재능을 보람 있게 쓰는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지난 시간들을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가족만을 위해 살았다면 어쩌면 이제부터는 진정한 나 자신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돈 버는 일만 일이 아니다. 노는 것도 일이다. 뜻 있는 활동을 하고 봉사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다만 무엇을 할지 모르거나, 할 마음이 없어 안 찾거나 못 찾고 있을 뿐이다. 가만히 있지 말고 깨어 있자. 아침에 눈을 뜨면 나를 건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진짜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설레는 마음으로 구상하자.
오늘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짐승들은 스스로 질문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만이 자신에게 질문을 하며 그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며 이 시기를, 오늘을 보내야하나. 우선 많은 생각과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자. 특히 침묵의 시간을. 그리고 정답은 없지만 각자의 상황에 맞는 것들을 찾아가면 자신만의 답을 얻어낼 것이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하되 될 수 있으면 밝고 행복한 일을 그리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면 행운이고 오늘 못 찾았다 해도 내일 찾으면 된다. 찾아가는 그 과정 역시 내 길이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눈을 뜨며 내게 말한다. 무엇을 하며 오늘을 살아야 진정 ‘나’ 다울까?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지혜로운 답을 찾아가려고 깨어있을 그대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