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산다는 것 PART 03 - 자연을 공유하다
자연과 사귀는, 소박한 생활의 힘과 매력
도시란 인간이 고안한 썩 성공적인 발명물이다. 매력도 편의도 많은 장소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도시를 미련 없이 떠나거나,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시골에서, 자연 속에서 한결 만족스러운 삶을 구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기대에서다.
귀촌자의 성향은 다양하다. 도법자연(道法自然), 자연이 곧 길이라는 고매한 소식에 이끌린 귀촌자. 도 연명처럼 귀거래사를 노래하며 낙향, 어버이 품과도 같은 자연 안에 은둔한 산림처사. 도시라는 전쟁터에서 코피를 한 말쯤 쏟고 퇴각한 부상병. 텃밭 농사와 산야초 채집으로 육체 건강을 돋우려는 요양객. 전원생활의 목가적 안락을 기대하며 무작정 산골로 뛰어든 은퇴자. ‘졸혼’이라는 요상한 명분으로 배우자를 따돌리고 시골에 단독 입장한 나그네. 저마다의 이상과 형편에 따른 귀촌이지만, 삶의 증상을 개선하고 자연과 친선을 도모해 도시에서 맛보지 못한 안심과 만족을 누리겠다는 의도가 공통분모로 깔려 있다. 인간 역시 자연이니 자연으로의 귀환은 자못 자연스럽다.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귀촌을 통해 자연스러운 삶, 자연에 동화하는 일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엔 오류가 없다. 그러나 인생사가 다 그렇듯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나 뇌물은 없다. 바보가 아니라면,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라면, 시골살이 역시 한바탕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드라마로 점철되리라는 걸 미리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행복한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불운과 불안이 끼어들지 않는 인생에 무슨 흥미가 있겠는가. 시골살이의 애환과 고독이란, 도시에서의 그것과 사실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자연과의 교제를 원만하게 수행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나의 삶에 자연이 단단하게 붙어 있을 경우엔 생활의 품질이 달라진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욕망의 문제다. 망둥이처럼 내면에서 날뛰는 욕망이라는 놈을 어떻게 해치우느냐에 삶의 진실이 달려 있다. 우리가 법정 스님이 아닌바에야 감히 무소유나 무욕을 꿈꿀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도 늘 물욕과 탐욕에 휘둘린다면, 그건 스타일 구기는 일. 시골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소탈하게 살아가는 실험은 어쩌면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욕망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다 떠날 존재들
소박한 생활! 시골에서 구현할 가치가 있는 건 아마도 그것이다. 허영과 허세를 털어내는 소박한 시골 살림을 추구할 경우, 뜻밖에도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뉴스를 나는 곧잘 귀로 들었다. 산골에 사는 원로작가 P씨는, 시골살이의 무엇이 당신을 즐겁게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가난한 밥상이지. 물 말은 밥에, 텃밭에서 거둔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간소한 식사가 나를 즐겁게 해. 잡다한 미식과 탐식에서 해방돼, 비로소 정갈한 식사를 한다는 만족감 말이야.”
손수 길러 거둔 간소한 푸성귀로 식욕을 만족스럽게 채우는 경험이란 그에게 초유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과도한 식욕과 성욕 사이에서 갈피없이 흔들리다 떠나는 게 인간이다. 가급적 포식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비싸고 화려한 메뉴로 과시적인 식사를 하고서야 시원한 트림을 토하는 게 도시적 식생활이다. P씨의 ‘만족감’은 이와 같은 식욕 노예에서 해방됐다는 자성(自省)의 표명으로 들렸다. 내 손으로 직접 작물을 거둬 청정한 찬을 밥상에 올릴 수 있는 텃밭 농사는 가히 매력적이다. 식량을 자급한다는 성취감과, 농약 따위에 오염되지 않은 안전 식품을 섭취한다는 안심 때문이다. 텃밭 농사는 단순히 입을 즐겁게 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으로 이행하는 징검돌이니 말이다.
자그마한 텃밭에 몇몇 채소류를 심어 가꾸는 행위에는 소소하다 할 수 없는 풍미가 있다. 밥상에 청치마 상추를 올리기 위해서는 봄철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겨우내 얼어 굳어버린 텃밭 흙부터 골라줘야 한다. 초봄의 흙을 만지작거리는 일은 대지라는 자연에 슬쩍 키스를 하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온기에, 향긋한 흙냄새에, 댄스를 하는 지렁이들의 징그러운 생기에 와락, 모종의 감명과 애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경줄이 뻣뻣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흙이 지닌 원초적 생명감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상추씨를 뿌리고 나면 거의 순식간에 싹이 돋는다. 대체로 열흘쯤이 지나서야 연둣빛 싹이 올라오지만, 우우우 지상으로 들고 일어서는 싹들의 놀라운 기운생동을 보자면, 이미 파종 순간부터 지하에선 맹렬한 발아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에서, 씨앗을 기르는 흙의 힘에 경이를 표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흙 위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이치를 사색할 기회이기도 하다. 흙 속에서 출발, 햇빛과 비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쑥쑥 자라는 싹들의 기적에 비하면,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는 신기한 축에도 들지 못할 지경이다.
자연과의 교제로 야성(野性)을 회복하자
자연의 사업이라는 게 이와 같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인식하면, 저마다 잘났다고 설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청치마상추씨 하나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 아니한가? 상추 몸에 들어 있는 하얀 진액과, 초원에 핀 들꽃의 수액이, 인간의 혈관을 흐르는 피와 무엇이 다른가. 사람 역시 지수화풍(地水火風), 그 자연의 산물이거나 미물이거나 명물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신통한 효과를 불러들인다. 교만에서 겸양으로, 이기(利己)에서 이타(利他)로, 불화에서 조화로, 말하자면 고루하거나 비루한 기존의 타성에서 어느 정도 참하게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누구나 아는 소식이지만, 물신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세상이다. 원로 종교인이 후배 성직자들을 모아놓고 써늘하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다오, 돈과 신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 답은 돈이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 돈을 싫어한다는 별종을 나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가상한 존재들은 있기 마련. 나는 귀촌한 사람들의 입에서 굴러 나오는 복음을 간혹 얻어 들었다. 일테면, 월 생활비 단돈 50만원으로 시골생활을 무탈하게 영위한다는 어느 충청도 부부의 얘기는 이렇다.
“끄떡없슈. 먹거리는 자급자족하지, 시골생활이 재미있으니 굳이 외출할 일 없어 돈이 굳지, 산이나 숲이 입장료 달라고 손 내밀지 않지, 돈 들 일이 벨로 없슈!”
숲에 사는 새들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으로 알아 사계를 산다. 태어날 때 두르고 나온 터럭 외에 춥다고 옷을 겹쳐 입는 산토끼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이 이들의 삶을 시늉할 수는 없다. 고등동물이라 자부하는 인간의 문명은 그 자체로 위업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돈, 돈 하며 사는 건 아닐까. 반쯤은 이미 돈 게 아닐까.
자연에 동참하는 시골살이로는 돈의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만족 요소들이 늘비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연주하는 사계의 변화무쌍한 풍경과 선율에 오감을 열면 된다. 돈을 써가며 극장엘 가지 않아도 숲에선 연일 개봉작이 상영된다. 개구리 우는 무논에도, 개미굴에도, 가뭄을 견디는 들판에도 저마다의 삶이 있고, 고통을 견디는 간절한 몸짓이 있다. 사위에 넘실거리는 이 다양한 자연상에 감정이입할 실력만 있다면 곳곳이 흥미진진한 영화관이며, 정서와 정신을 일깨울 마음 수련장이다.
복되도다! 자연과 교제해 내 안의 야성(野性)을 회복하는 사람 말이다. 그는 욕망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태의 난리블루스와 두려움 없이 결별할 수 있다. 내 삶의 자존감과 주체성을 이미 회복했을 테니까. 집이 작고 허름하면 어떤가. 마당이 좁으면 무슨 상관인가. 시골집 주변의 모든 산야를 나의 집으로 여기길 뜯어말리는 사람은 없다. 밤하늘에 모인 투명한 초록별들을 바라보며 감수성을 배양하는 일 같은 건 도시에선 가능치 않다.
정신에 힘과 만족을 부여하는 자연 속의 소박한 삶. 이는 가짜 욕망에 속지 않을 수 있는 내공을 얻을 기회로서 결함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인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방식이다. 환상이나 계산 중심으로 귀촌을 가늠하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을 생각이겠지만.
글 박원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