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남긴 나눔이 생명의 불씨가 되어
“새 생명을 이어가는 선물이 되어주세요.”
▲ 생명의 불씨가 되는 장기기증 〈출처 : 새생명장기기증생명본부〉
한국의 장기기증 시스템의 현실
현재 우리나라의 장기기증은 반드시 ‘뇌사’라는 진단(DBD;Donation after Brain Death)을 받은 경우만 가능하다. 건강할 때, 아무리 장기기증 의사를 강력하게 밝혔다 하더라도, 돌아가시는 시점에서 뇌사가 아니라면 장기기증을 할 수 없다. 연명의료 중단을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본인이 장기기증 희망이 있었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장기기증으로 연결될 수 없는 것이 한국의 장기기증 시스템의 현실이다.
하지만 많은 나라들이 사후 장기기증 시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DCD;Donation after Circulatory Death)을 시행하고 있는데, 뇌사와 다른 개념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심장이 멈추고 혈액순환이 정지된 환자의 장기를 얻는 것을 말한다. 선진국의 경우, 장기기증자의 삼분의 일이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한 스페인 외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의 일부 나라는 국민 스스로 나와 타인을 위해 장기기증은 당연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어, 생전에 장기기증에 대한 거부 의사가 없으면 오히려 장기기증자로 보고 자동으로 사후에 장기기증을 진행하는 옵트아웃(opt-out)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장기기증이 되려면 생존시 의사를 밝혀두고, 유가족의 동의를 얻고, 뇌사판정을 받은 경우만이 기증으로 이어지는데,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뇌사장기기증에 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문화 정착 또한 절실한 상황이다.
‘생명나눔’ 문화실천을 위한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장기기증자 기억식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지낸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1988년 설립이후 생명존중과 나눔실천을 위해, 생명운동과 국내외 사회 복지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2023 장기기증자 봉헌의 날’ 행사가 지난 10월 28일 토요일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시행되었다. 생명나눔을 실천한 장기기증자와 그 뜻을 함께한 기증자 유가족, 그리고 기증희망자분들이 참석한 이번 행사에서는 미사와 정호승 시인의 강연으로 뜻깊은 시간이 마련되었다. 미사 중 기증자 기억식이 진행되어 신장이식수혜자의 사연나눔으로 기증자분께 감사함과 생명나눔의 온기가 전해질 수 있었고, 봉헌갱신식을 시행하여 장기기증자의 숭고한 생명나눔을 기리고, 기증희망자의 기증 의지를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장기기증자 봉헌의 날 행사와 같이 아무런 대가 없이 생명나눔에 동참하고, 생명나눔을 이어가고 있는 분들이 함께함으로써 생명나눔 문화가 우리나라에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한국의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은 그렇지 못하여 안타깝다.
▲ 2023 10월 28일 장기기증자 봉헌행사의 날 〈출처 : 한마음한몸운동본부〉
▲ 2023년 10월 28일 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사전 프로그램으로 생명운동센터 이창하 팀장의 장기기증 교육을 통해
기증희망신청 후 실제 장기기증이 이루어지는 사후 절차를 안내 〈출처 : 한마음한몸운동본부〉
▲ 유경촌 티모테오주교의 주례로 장기기증자와 기증자 유가족, 기증희망자를 위한 미사 봉헌 〈출처 :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장기이식 대기자 오만명, 기증이 절실하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생명운동센터 임수현 씨는 “법적으로 매매가 허용되지 않는 장기는 기증만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지만, 우리나라 국민은 본인과 내 가족의 몸에서 장기를 떼어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불안이 크다.”며 “한국인의 오랫동안 깊게 뿌리 박힌 관습과 매장문화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장기를 사후 적출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크다.”고 한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가 1997년부터 매년 9월 둘째 주를 장기주간으로 정하면서 시작된 9월 9일 장기기증의 날은 뇌사자 한 사람이 심장, 간장, 신장, 각막 등을 기증하면 아홉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장기기증의 날이 정해지고 장기기증문화를 심고자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같은 여러 단체가 노력하고 있으나, 국내 장기기증 현황은 여전히 저조하다. 지난 11일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장기이식 대기자는 4만9,765명으로 5만명에 육박하지만, 기증자 수는 대기자수의 1/10에도 못 미친다. 이식 대기자의 평균 대기시간은 3년을 훌쩍 넘고, 매일 여섯 명이 이식을 기다리다 결국 사망한다.
실제 2017년 장기기증자의 시신 수습 및 이송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지 않고 모두 유족에게 떠넘겨 예우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여기에 장기기증자와 그 유족에 대한 국가·사회적 예우가 부족하다 보니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이다. 이후 시신 이송 비용은 국가가 책임지고 있지만, 여전히 지원과 예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가령 대부분의 선진국은 장기기증자 이름을 새긴 기념 공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보라매공원에 설치된 장기기증운동 기념 조형물이나 몇 개 병원의 추모벽,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장기기증자 나눔자리와 같은 공간이 전부이다.
장기기증을 활성화하여 생명 존중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기증자와 그 유가족을 예우하고 돌보는 일이다. 우선 기증자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작은 공원을 만들어 그곳에 기증자의 이름을 새긴 조형물을 세움이 필요하고, 해외 주요국의 경우처럼 기증자 유족의 심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wUiMX1Sp-o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나눔자리소개영상
▲ 2015년 진행했던 뇌사 장기기증자 추모 전시회 당시 모습 〈출처 :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 은평성모병원 ‘김수환 추기경 기념’ 장기이식병원 내에 마련된 장기기증자 ‘기억의 벽’(Wall of Remembrance) 〈출처 : 메디컬뉴스〉
▲ National Donor Memorial(미국 국립 기증자 추모관) 〈출처 : sunos.orgnewsnational-donor-memorial-virtual-tour〉
장기기증은 생명 살리는 숭고한 나눔
국내 장기기증자의 90%는 생존시 기증자다. 우리나라의 뇌사 장기기증률은 인구 100만명 당 7.88명(2022년)으로 우리나라의 5배가 넘는 미국(44.5명)과 스페인(46.03명)의 기증률과 영국(21.08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뇌사 장기기증률도 낮지만, 미국은 전체 장기기증 중 80%가 뇌사자 기증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35%에 불과하다. 이처럼 국내 뇌사자 장기기증이 저조함에 따라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한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DCD)도 그중 하나다.
이제 국내에서도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제도에 대한 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본격적으로 논의 돼야 할 시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제도는 이미 선진국에서 법제화되어 있는 제도다. 문제는 국내에서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합리적이고 명백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구성원의 공감과 동의도 필요하다.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의미있는 죽음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전 국민적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이고, 고인이 남긴 생명나눔이 생명의 불씨가 되어 수혜자의 고통을 나누는 고귀한 실천임을 공감하는 계기가 많이 마련되어야 한다.
참고
한마음한몸장기기증센터 http://www.obos3042.or.kr/
한국장기조직기증원 - 뇌사장기기증,조직기증 (koda1458.kr)
새생명장기기증본부 https://www.lovejanggi.or.kr/html/
https://www.youtube.com/watch?v=zNYcX3z3aBk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이 제작한 생명나눔과 관련한 홍보영상 콘텐츠입니다. '뇌사'에 대한 올바른 정보와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시민기자단 최미진 기자(marmara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