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 여기저기 노란 민들레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신기하게 빽빽한 돌 틈에서도 어김없이 솟는 꽃이 민들레지요.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는 질기고 강한 생명력에 박수를 보내게 됩니다. 하늘이 맑아서일까요. 아파트 주차장에 고개를 다소곳이 세운 민들레가 말을 걸어옵니다.
“여보세요. 어딜 그리 급히 가세요? 천천히 잠시 쉬었다 가세요.”
잠시 멈춘 채 노란 민들레 꽃잎을 바라봅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꽃잎이 서두를 것 없다고 다시 소곤거립니다. ‘그래. 저 혼자도 잘 가는 시간인데 같이 서두를 게 뭐 있나.’ 시선을 낮추어 노란 꽃잎 하나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한 낮이라 차들이 빠져나간 주차장 모서리로 풀들이 비집고 나오느라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거친 콘크리트 바닥을 비집고 나와 하늘대는 이름 모를 풀꽃을 보니 문득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떠오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크고 화려한 꽃도 아닌데 늘 마음에 들어와 서성이다 가는 풀꽃들. 바쁜 마음을 다독이니 여유가 생깁니다. ‘어쩌다 이곳에 뿌리를 내렸니?’ 이번엔 내가 말을 걸어봅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가만히 바라봅니다. 돌보는 이 없이 제 멋대로 자란 풀꽃 위로 ‘중년’ 이라는 글자가 겹칩니다. 이도저도 아닌 애잔한 이름입니다.
숨 고를 새 없이 앞으로만 내달렸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도 없이 말입니다. 내달린다고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달렸을까요. 달리다 보니 한 순간 중년이라는 길 위에 섰습니다. 주위도 둘러보고 한 번씩 뒤돌아 서 서 지나온 길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늘이 생긴 의자에 앉은 채 잠시 생각합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허둥지둥 아이들을 키우고 피곤에 지친 아내가 되어 일상적으로 남편을 대하고 그렇게 다들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거울 저 편에서 반짝 빛나던 흰 머리를 처음 발견하고 흠칫 놀랐던 시간도 벌써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지나온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두 딸이 말이 통하는 어른으로 성장했고 선물처럼 생긴 막내가 손이 덜 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온 몸을 채우던 기운이 스르르 빠져 나갑니다. 엄마로, 아내로, 딸로, 며느리로 지내는 동안 훈장처럼 빛났지만 버겁던 이름들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삶의 방향키처럼 큰 딸이 저를 꼭 닮은 딸의 엄마가 되어 가벼워진 풍선에 산소 같이 청량한 바람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주 작은 꼬맹이가 말을 배우더니 함무니, 함무니, 하면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알고 보니 할머니라는 이름은 내 딸이 엄마가 되면 생기는 이름이었습니다.
특별하게 생긴 할머니라는 이름은 훈장처럼 두르던 이름 보다 즐겁고 감사했지만 한편으론 낯설고 어색한 이름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한 시름 놓았는데 이대로 돌이킬 수 없는 할머니가 되어 또 다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뭘 할 수 있을까?’ 막연했지만 작가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처럼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대문 밖은 생각보다 따스했습니다. 꿈꾸는 중년들도 많았습니다. 모두가 어른이라고 하니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마음 한 구석에 꿈이 있다는 것을 중년이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겨우내 다독이며 천천히 가려던 마음이 가끔 저 혼자 달음박질 합니다. 꿈이 생기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청년인 듯 달리다 숨이 가빠오면 그때서야 꼭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때로는 비슷한 연배의 다른 이에게서 나를 확인합니다. ‘아! 나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저 모습이겠구나.’ 하고 새삼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기도 합니다. 피부도 세월을 먹느라 한 겹 두 겹 나이테를 만드는지 확실히 푸석하고 거칩니다. 세상에 순응하듯 이마를 가로지르는 작은 골이 패이고 눈꼬리에 힘겨운 삶이 접히더니 윤기 나던 검은 머리칼은 서리서리 흰 서리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뒤따라 걸으며 본 친정엄마의 무너져 내린 어깨가 시선을 잡습니다. 커다랗게만 느껴지던 엄마의 굽은 등이 한손에 잡힐 듯 애처롭습니다. 지난 해 늦가을 생사를 오가며 두 달여를 보내고 씩씩하게 병을 떨친 엄마는 삶의 나머지 시간을 얻은 대신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돌이킬 수 없는 노년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엄마도 꿈이 있었을 텐데 다 내어주고 빈 껍질로 남았습니다. 반걸음 앞 서 걷는 엄마의 위태로운 뒷모습이 중년이 된 딸의 마음에 오롯이 들어옵니다.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어느 새 따라 걷고 있습니다.
분주하던 엄마의 쉼은 병든 노년이 되어서야 주어졌습니다. 빌라가 다닥다닥 모여 있는 가난한 도시의 골목을 나오면 유일하게 있는 놀이터 한 구석에 자리한 동그란 의자 마다 내달려온 노년들이 쉬고 있습니다. 커다란 등나무가 나무 기둥을 휘감고 올라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놀이터 구석자리 의자에 달리 인사를 나눈 적 없는 비슷비슷한 노년들이 삼삼오오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등나무 아래 노년의 시계는 아주 급하거나 너무 더디거나 제멋대로 흘러갑니다.
중년의 딸은 틈 하나를 메꾸듯 엄마 옆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슬그머니 노년의 삶으로 다가갑니다. 무심히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중년의 딸을 보면서 각자의 딸을 생각하거나 당신의 중년이 얼마나 그리운 시간이었는지 회상하고 있겠지요. 그래요. 지금 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노년의 쉼터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푸릇한 중년을 꾸역꾸역 건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