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과 2019년 4월이 우리 엄마에겐 참으로 아픈 4월이 되었다. 엄마가 그 아픔을 견디며 무심한 듯, 한 마디씩 꺼내놓는 지난 얘기들을 들으니, 최근에 우리 가족에게 생긴 일이 운명인지 우연인지, 어쩌면 신화 같은 현실이란 생각이 든다.
흔히 ‘신화’라고 하면 그 유명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생각하겠지만, 우리에게도 많은 신화들이 있고 구전으로 익히 들어 아는 신화 속 이름들이 있다. 옥황상제, 염라대왕, 삼신할머니... 이런 이름들은 학교 같은 곳에서 딱히 배운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할머니나 엄마, 아버지를 통해 들은 이야기 속에 있었고 우리 생활 깊숙히 숨어 있다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참으로 이상하다 느낄 때, 그런 이름들과 함께 신화가 떠오른다.
까마득하게 먼 옛날 하늘나라 동정국의 ‘범을황제’에겐 아들이 아홉이 있었는데, 위로 삼형제, 아래로 삼형제가 죽어서 가운데 삼형제만 남았다. ‘범을황제’는 남은 아들들도 열다섯 살을 못 넘기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을 듣고 삼형제를 인간 세상으로 보낸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 은그릇 장사, 놋그릇 장사, 비단 장사를 하던 세 아들은 ‘과양상이’가 준 술을 마시고 죽고 만다. ‘과양상이’는 삼형제의 시체를 연못에 던졌는데 거기에 고운 꽃 세 송이가 피었다. 그 꽃들이 예뻐서 집으로 가져온 ‘과양상이’는 꽃들이 자기를 괴롭히자 화롯불에 넣어버린다. 나중에 화롯불에서 빨강, 노랑, 파랑 구슬 세 개를 발견해서 늘 손에 들고 다니다가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구슬 세 개가 목안으로 넘어가 버렸다. 얼마 후 ‘과양상이’는 아이를 갖게 되고 열 달이 지나 아들 세쌍둥이를 낳는다. 세 아들은 아주 잘 자라서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모두 과거에 급제 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리다가 엎드린 채 죽어버린다. 큰 슬픔에 빠진 ‘과양상이’는 원님에게 가서 왜 아들들이 죽었는지를 밝히라며 생떼를 쓰기 시작한다. 날마다 괴롭힘을 당하던 원님이 영리한 ‘강임이’를 저승으로 보내서 염라대왕을 데려오라고 명한다. 우여곡절 끝에 ‘강임이’는 임무를 완수하고 염라대왕은 ‘범을황제’의 아들들을 죽인 ‘과양상이’를 벌주려고 그리 만든 것이라고 밝힌다. 사건의 전모를 밝힌 후 염라대왕은 세 아들을 다시 살려 하늘나라 동정국으로 보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과양상이’는 염라대왕의 금부채에 맞아 산산이 부서져 모기떼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겪으면서 의문을 갖다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모기들은 왜 생겨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괴롭히는 걸까? 왜 자식이 부모 보다 앞서서 세상을 뜨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된 걸까? 등등
지난 4월 14일에 췌장암 진단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오빠가 돌아가셨다. 두 달 전 강릉 아산병원에서 만난 오빠는 너무나 병색이 완연했다. 아무런 도움을 줄 수도 없어 그저 마음으로 엄마보다 조금만 더 살아주기를 기원하며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오빠는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에 서둘러 가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기 며칠 전 나의 작은 오빠가 되었을 엄마의 둘째 아들이 겨우 두 돌 반을 넘긴 어린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오빠들은 생일이 똑같은 날이었다. 엄마의 얘기를 유추해 볼 때, 작은 오빠가 다른 세상으로 간 날도 아마 같은 날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오빠들의 태몽 얘기를 한 적 있다. 큰 오빠 때는 용 두 마리와 바닷가에서 같이 놀다가 여의주를 입에 문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작은 오빠 때는 어딘가로 여럿이 놀러 가다가 돼지를 키우는 친척을 만났는데, 돼지를 한 마리씩 고르라고 해서 엄마가 제일 토실토실하고 예쁜 돼지를 골랐더니, 그 친척이 그건 산돼지라며 다른 걸 권하는데도 그 돼지를 안고 집으로 왔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쌓여 있던 엄마는 매일 해가 질 무렵이면, 죽은 아들이 묻혀있던 산 쪽에서 초롱을 들고 걸어 다니는 아들이 보이곤 해서 이름을 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결국 4월이 끝나기 전에 안동을 떠나 영주로 이사를 했다.
긴 세월이 지나 다시 한 번 같은 아픔에 맞닥뜨린 엄마의 울부짖음 속에 ‘뭐가 그리 급해서 나를 두고.’ ‘이런 꼴을 보려고 내가 이리 오래 살았나.’ 하는 탄식이 들어 있었다. 내 슬픔은 힘들었을 오빠에 대한 연민과 오빠와의 추억들 때문인데, 엄마의 아픔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인 질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우리 엄마뿐만 아니라 자식을 앞세운 많은 지인들이 있다. 그분들도 모두 울부짖었을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 탄식했을 것이다.
모르겠다. ‘과양상이’는 무슨 원한으로 ‘범을황제’의 자식들을 죽였는지, 자기 아들 셋을 갑자기 잃었을 때의 아픔이 어떠했는지, 과연 ‘과양상이’가 받은 벌은 합당한 것인지. 어떤 운명으로 태어나고 죽는지, 4월이면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는 아픔의 진짜 원인 도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어떤 답을 들어야 속이 시원하게 풀리겠는가?
어쩌면 수천 년을 이어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이 가르쳐주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픔들은 인류가 생겨나고 그 긴긴 세월 동안의 인간사에 벌어진 무수히 많은 일들 중 하나일 뿐이며, 이것이 나만의 아픔, 우리만의 아픔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야기 안에 아픔을 해소하는 힘을 알려주는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기껏 위로는 함께 울면서 ‘두 오빠가 함께 있을 거 같다고, 그곳은 아픔이 없는 세상일 거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믿고 싶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의 ‘사자왕 형제’에 나오는 죽음 너머 평화롭고 아픔이 없는 세상, ‘낭길리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