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니 어버이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엄마(어머니가 아니라)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육십이 다 된 나이에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3년 전, 2016년 유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칠순 잔치 마치고 자리에 누워 꼬박 13년을 병상에서 보낸 뒤입니다. 1935년생이시니 살아계시면 여든 다섯이시지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 엄마 안 오시네, /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금간 창 틈으로 엎드려 훌쩍거리던 /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생각하면 그때는 왜,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가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늘 부재중이었습니다. 엄마가 없는 집은, 아니 방은 얼마나 쓸쓸했던지요.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윗목에 쓰러져 자다보면 잠결에 들려오던 엄마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반갑고 서글프던지요.
1974년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5월8일 어머니날, -그때는 어버이날이 아니고 어머니날이었습니다.-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 산문을 써야 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라니? 어떻게 써야 하나요? 지금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은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요. 마음속에서 ‘엄마’라고 되뇌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저를 힐끔거리거나 말거나 글을 마치는 내내 눈물 줄줄, 콧물 훌쩍, 원고지만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글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글의 시작이 엄마였습니다. 만 열두 살 세상물정 모르는 천방지축 어린 것이 처음 글을 쓴 것이 엄마에 대해서였으니 말입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써볼까 했습니다. 물론 어떻게 해야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지도 몰랐지요. 생전 처음 쓴 제 처녀작은 별명이 ‘주팰래’-축구를 잘하던 펠레인 줄 알았지만 학생들을 잘 팬다고 해서 팰레였습니다.-로 불리던 문예부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혹독한 평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평도 아닙니다.
“이것도 시냐?” 그리고 원고지를 허공에 휙 날렸습니다.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써내려간 제 필생의 역작(?)은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돼버렸습니다. 그날 처음 소주를 마셨습니다. 성북동 달동네 셋방으로 올라가는 어두운 골목에서 병나발을 불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글 같은 건 쓰지 않으리”
그때 세상의 끝 같던 그 어둡고 축축한 골목에서 저를 구원해준 사람도 엄마입니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온 밤거리를 헤매던 엄마 눈에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아들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도마 위에서 자랐다 / 네모진 도마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 냉골의 장판 아래 / 누군가 살다 간 흔적만이 / 내 비늘들을 녹여주었다 //(중략)// 연속극이 다 끝나도록 / 오지 않는 엄마 / 나는 도마의 구석에 몸을 뉘였다 / 떨어진 비늘들 찍어먹으며 / 이마 위 차가운 잠을 껴안곤 했다 // 어린 꿈 속엔 / 부엌칼을 피하려 / 허둥거리는 몸부림 / 도마 위를 헤엄치는 내가 있었고 / 형광등 밑엔 아직도 파닥파닥, / 엄마가 거기 있었다
-서기웅, 「도마」, 『만리동 고개를 넘어가는 낙타』 문학의전당, 2011
지금은 제법 알려진 만해백일장 행사가 있습니다. 1979년 3월1일 제1회 대회가 열렸습니다. 삼일절 공휴일이어서 모처럼 부모님과 동생까지 온 식구가 함께 아침밥을 먹은 직후입니다. 부랴부랴 방문 앞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던 제 귀에 들려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쌀이 다 떨어졌는데 어떡해요!” “뭐 내다 팔 것 없을까? 주인집에라도 좀 빌려보지”
세월이 흘렀든 아니든, 당시 적빈의 하루하루를 건너가던 부모님이 가졌을 막막한 심정을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요행히 그날 저는 그 백일장에서 입상했습니다. 상을 받는 것보다 더 좋았던 건 상금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친구들의 축하와 칭찬은 뒷전이고 제 관심은 상금이 얼마인가였습니다. 상금봉투에는 당시로는 거금인 10만원이 담겨있었습니다.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지금도 교복 안주머니를 꼭 쥐고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그 봉투를 내밀던 성북동 언덕배기 단칸방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엄마는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며 제 손을 꼭 쥐어주셨습니다. 끝내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그날 부모님과 제 동생은 점심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글도 돈이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내가 쓴 글이 우리 식구의 끼니가 되다니요!
세월이 흘러 저도 어른이 되고 아비가 됐습니다. 저도 제 어린 것들의 입을 걱정하며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그 세월이 아프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힘이 되었던 것은 엄마였습니다. 그 엄마가 이제는 안 계십니다. 꿈에라도 뵐 수 있으면 하는데 한 번도 안 오십니다. 훌쩍.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수많은 시가 쓰여졌다 // 나는 육이오 전쟁 중에 태어나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 아우슈비츠 유대인만큼 지독하지는 않지만 / 헐떡이며 숨막히며 가슴 두근거리며 살아왔다 / 머리털 손톱 발톱 뽑히지 않았지만 / 내일을 모르고 희망의 벽에 둘러싸여 /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로든 나가보려고 / 오늘을 할퀴며 살아왔다 // 아직 목숨이 붙어 있어 이렇게 시라는 걸 끄적거린다 /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는 통곡을 하며 죽어갔는데 / 나는 누구 심금 울리려고? // 퉤!
-박해석, 「나쁜 서정시」,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민예당,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