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며느리’ 타이틀을 달고 25년째 무사히 살고 있는 K씨. 성격 좋다는 소릴 자주 듣는다. 그럼에도 남편의 성씨인 L씨 집안 모임에 참석하는 날이면 늘 예민하고 불편해한다. 어제는 시모의 생일 저녁 회동이 시내 한 식당에서 열렸었다. K씨는 사람들의 대화를 관망하며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길 바랐다, 손위 시누이가 “며칠 전에 거울을 보다가 말야” 라고 말하기 전까진. “깜짝 놀랐지 뭐야? 글쎄, 거울 속에 엄마가 있는 거야. 내 얼굴인데 엄마 얼굴로 보이는 거 있지?” “나도 나도!” K씨는 빛의 속도로 응답했다. “어, 올케도?” 강력한 공감자를 만난 시누이는 호감어린 눈빛으로 K씨를 바라봤고, 두 사람은 찰떡 호흡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급속한 유대감이 형성된 것이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데서 오는 친밀함 혹은 유익함? 아무튼 50-60세대라면 K씨와 같은 낯익음과 낯설음에 공감할 것이다. 고단함과 고집으로 굳은 아버지의 얼굴이 보기 싫었는데, 어느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바로 아버지의 그 얼굴을 하고 있다니... 엄마의 주름살 패인 얼굴을 외면하며, 난 엄마와 다르게 살거라 다짐했었는데 어느새 내가 엄마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니... 누구라도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를 것이고, 그런 과정을 앞서 걷는 부모의 모습은 낯익은 삶의 풍경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중년이 돼버렸다? 도무지 낯설다. 세상은 우리에게 ‘나이 든 어른답게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 고 하지만, 우린 지갑을 열기엔 아직 가난하고 입을 닫기엔 할 얘기가 너무 많다. 피는 또 왜 이리 뜨거운지, 배우고 싶은 것 투성이고 경험해보고 싶은 게 지천이다. 우리만 그런가?
런던 근처 어디메쯤에서 사는 메이 여사에게 물어보자.
영화 마더(영국. 2003. 로저 미첼 감독) 속 주인공 메이는 특별함이라곤 한 점도 보이질 않는 60대 후반의 어머니. 어느날- 우리네 인생에서 예기치 않은 일은 언제나 그렇게 다가오듯 - 메이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황망하고 허전한 마음을 자녀들과 나눠보려 한다. 하지만 성공한 아들은 그 성공을 유지시키느라 바쁘다. 성공하지 못한 딸은 어떻게든 버터내려고 아등바등한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에서 점점 애인에게 집착한다. 자녀들은 더 이상 엄마의 손길 따윈 필요치 않는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아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서성이는 메이를 향해 “가만히 좀 계세요.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에요?”라고 소리친다. 물론 메이는, 어머니를 향한 일반적 시선을 배신하며, “왜 난 힘들게 하면 안 되는 건데?”라고 응수하지만, 이내 무기력해진다.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지 아득하다. 그녀 인생에 틈새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 틈새를 타고, 이전엔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메이의 낯선 욕망이 터져나온다.
엄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닌, ‘여자 사람’ 메이가 뜨거운 사랑을 시작한다. 다름 아닌, 딸의 애인 대런을 상대로! 대런은 세상 잣대로 보면 참 ‘없어 보이는’ 목수지만 메이에겐 눈이 번쩍 뜨일만큼 친절하고 생기 넘치는 존재다. 그에게 빠져들면서 메이는 스케치북에 자신의 나신을 그려간다. 대런과 나눈 사랑의 행위도 적나라하게 그린다. 그 그림들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들통나고, 자녀들은 “우리 엄마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라며 대노한다. 엄마의 노골적 반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네 가족 사회와는 다른, 영국 어느 가족의 대단히 산뜻한(?) 해결 방식이 궁금하다면, 또한 대런과의 첫 육체 관계 때 “이젠 아무도 내 몸을 만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장의사 외에는.” 이라고 말하는 메이를 보고 당신 가슴에 어떤 감정이 올라올지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만나보라. 스포일러 하나 건네자면, 영화의 엔딩은 홀로 여행 떠나는 메이의 뒷모습으로 채워지는데 여간 상쾌한 게 아니다.
영국인 엄마 메이에 뒤지지 않을 엄마가 한국에도 있다. 영화 경축! 우리 사랑(2008. 오점균 감독) 속 봉순씨는 스물한 살 어린 남자를 사랑하고 그와의 결혼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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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젊은 남자가 바로 딸의 약혼자였다는 점과 비록 함량 미달이지만 엄연히 남편이 있다는 점이다. 발칙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흥!’ 이다. 봉순씨는 직진한다. 오직 가정 살리기에만 매진한 쉰 살의 아줌마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누리고자 결단을 한다면 얼마나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유쾌하게 보여준다. ‘희생적 어머니상’에 깔려 거세당해온 여성의 욕망을 ‘좀 꺼내보면 어때?’라며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야기’란 단어가 나와서 말인데, 언제부턴가 나의 영화 취향이 변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상징과 실험적 화면들, 피철철 넘치는 심장공격형 장르물보다는 잔잔하게 내 귀에 속삭여주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수다가 넘쳐나는 영화는 사절이다. 예를 들어, 워쇼스키 자매(예전엔 형제로 불렸음)감독의 영화 “매트릭스”를 보자. 1편은 인간 의식의 깨어남과 성장에 관한 바이블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멋지다. 그런데 2편과 3편에서 감독들은 자신들의 지적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관객들에게 설명하고 주장하느라 말이 많아졌다. 그 수다스러움에 지친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영화는 많다!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이란. 1987. 압바스 키오라스타미)이 이야기하는 단순한 핵심에 기울여보자. 어쩌면 당신에겐 상당히 낯선 스타일의 영화일 수 있다. 그대가 만일 속도감 강한 헐리웃 영화를 선호한다면 이 영화의 러닝타임 중 단 5분도 버텨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상에 남길 수 있는 영화 세 편만 고르라’면 나는 반드시 이 영화를 포함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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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어느 가난해 보이는 동네, 더 가난해 보이는 초등학교 교실. 그래도 아이들은 마냥 즐겁다. 다만 피하고만 싶은 공포의 순간이 있으니, 바로 숙제검사 시간이다. 영화는 선한 눈망울의 남자 아이 아마드가 방과 후 자신의 책가방에 짝꿍 네마자데의 공책이 들어있음을 알고, 어떻게해서든 그 공책을 네마자에게 돌려주고자 줄기차게 네마자데의 집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보여준다. 필사적으로 친구의 집을 찾으려 하는 아마드는 어른들에게 계속 묻는다. “네마자드의 집을 아세요?” 어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진리라도 되는 듯 대응한다. 이리로 가랬다 저리로 가랬다 헷갈리게 말하는 이, 대답 대신에 심부름을 시키는 이, 사는 게 어떻다고 훈계하는 이, 길을 알려준다면서 자기들끼리 말다툼하는 이, 아마드의 물음에 아예 귀기울이지 않는 이가 있다. 어른들의 ‘가르침질’ 덕분에 아마드는 자기집과 친구네 동네를 왔다 갔다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그 힘겨운 여정 끝에, 아마드는 무언가를 스스로 깨닫는다. 다음날 아침에 호랑이 선생님의 숙제검사가 시작되고, 네마자드는 숙제는커녕 책상에 올려놓을 공책이 없어 어쩔 줄 몰라한다. 바로 그때, 아마드가 교실에 들어선다. 그는 책가방에서 공책 두 권을 꺼낸다. 간밤에 방바닥에 웅크린 채 두 권의 공책에 똑같이 숙제를 채운 것이다. 아마드는 미소짓는다, ‘그냥 내가 해주면 되는 거였어. 이게 사랑인가? 그래서 행복한가봐.’라고 속삭이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찾는 구도자적 영화 한 편을 더 만나자. 지금은 고인이 된, 그리스 영화의 대가 앙겔로플로스 감독의 작품, 안개 속의 풍경(그리스 외. 1988.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 어린 소녀 볼라와 더 어린 소년 알렉산더는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아버지가 독일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고, 그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기차에 올라탄다. 기차에서 트럭으로, 오토바이로 옮겨타면서, 남매는 안개 내려앉은 길을 가고 가고 또 간다. 길 위에서 겪은 어른 세상의 폭력, 가난, 예술의 순수와 자유 등이 남매를 생명의 본향 같은 나무를 만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장선우 감독의 영화 ‘화엄경’이 오버랩된다. 아이 선재가 어머니를 찾아 떠다니는 여정을 통해 인간의 성장과 깨달음을 말하려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에 비해 이 영화는 고요하고 아련하고 서글프게 아름답다. 영상과 음악이 주는 여운이 워낙 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옛 영광을 잃어버린 쇠락한 그리스의 현실을 담고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 영화는 한 편의 시 자체이다.
아버지로 상징되든 어머니로 상징되든, 구도(求道)라는 게 특별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론 일상 속 작은 순간들과 결을 같이 해서 오히려 무시당하기도 한다. 매일 먹는 밥, 먹어도 먹어도 또 먹어야 하는 밥! 이 ‘식(食)’을 매개로 사람이 모이고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우리가 넓고 깊어지는 것도 결국 구도의 과정이 아닐까? 우리 중년들이 유난히 맛집을 찾아 다니는 이유가 단지 한 끼 식사를 해결하려는 건 아니리라. 음식의 맛, 향, 빛깔, 모양, 어우러짐이 우리의 마음과 관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 음식을 통한 힐링 이야기의 중심을 중년 여성이 잡아줘서 더 매력적인 영화들이 있다.
북유럽 느낌 충만한 카모메식당(일본. 2006. 오기가미 나오코)에서, 사치에 사장이 사랑으로 빚어주는 시나몬롤과 오니기리를 먹는다, 닮은 듯 다른 이웃들과 나눠먹는다. 종교적 규범과 금욕주의에 묶인 어른들이 바베트의 만찬(덴마크. 1987. 가브리엘 악셀) -바베트가 복권에 당첨된 돈 전부를 쏟아부어 차린-을 통해 서로를 향했던 증오와 미움을 내려놓고 손잡고 춤추게 되는 엄청난 힐링의 현장에 함께한다. 신앙도 일상도 경직된 마을 사람들이 비엔의 쵸콜렛(영국 외. 2000. 라세 할스트롬) 가게에 발을 들이면서, 그들의 딱딱한 뇌와 상처받은 마음들이 어떻게 녹아내리고 향기로워지는지 목격한다. 비엔 언니가 건네주는 쵸콜렛을 맛본다. 으음, 달콤해! 더할 나위 없이 맛있는 영화들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번 회에서 언급한 일곱 편의 영화와 더불어, 안토니아스 라인(1995. 네덜란드 외. 마를렌 고리스)을 꼭 기억해주시길. 조만간 자세히 소개할 작품이다. 이야기는 이야기인데 이야기를 넘어서는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차마 ‘잔잔한 이야기’ 범주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만, 지금 나 뭐하는 거지? 정해진 원고 분량의 두 배를 쓰고 있다. 간절함이다, 이 지면에 소개하는 영화들을 50+ 벗님들이 만나보면 진짜 좋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