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면서 신화에도 능통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 그가 쓴 책 중 <끝없는 이야기>에 나오는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인생을 비춰주는 것 같아 읽을 때마다 감흥이 새롭다.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는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하려고 고서점으로 들어갔다가 책 한 권을 훔치고, 그 책을 학교 창고에 숨어서 읽게 된다. 책은 어린 여왕이 자신의 이름을 잃어 병들고, 그 때문에 환상세계가 파괴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어린 여왕에게 이름을 지어줄 인간 세계의 구원자를 찾아 모험을 하는 '아트레유'가 등장한다. '아트레유'의 모험을 읽다가 자신이 그 구원자임을 알게 된 '바스티안'은 어린 여왕의 새 이름을 '달아이'라 지어주면서 책 속 환상세계로 들어간다. 새 이름을 갖게 되어 건강을 되찾은 어린 여왕 때문에 환상세계는 구원받는다. 그때 어린 여왕이 '바스티안'에게 준 목걸이에 달린 메달에는 서로 꼬리를 물어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는 어두운 뱀과 밝은 뱀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부터 환상세계는 '바스티안'의 모험과 상상의 힘으로 새롭게 만들어지게 된다.
700쪽이 넘는 이 책은 A~Z까지 26장으로 나뉘어져 있고 전반부는 '아트레유'가 환상세계의 구원자를 찾아가는 모험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바스티안'이 환상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며 자신을 잃게 되는데,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야기들은 매 장마다 역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로 가득하다. 그래서 어린이나 청소년만 읽는 책이 결코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 이야기들 중에 '천 개 문의 사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자주색 빛이 천천히 물결치면서 방의 바닥과 벽을 지나갔다. 커다란 벌집 구멍 같은 육각형 방이었다. 벽 두 개마다 하나씩 문이 있었고 그 사이에 있는 나머지 세 개의 벽에는 특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꿈같은 풍경의 그림과 반은 식물이고 반은 동물인 듯한 생물들의 그림이었다. 바스티안은 그중 하나의 문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문 두 개는 앞에 좌우로 있었다. 양쪽 문의 모양은 완전히 똑같았는데, 다만 색깔이 왼쪽은 검은색, 오른쪽은 흰색이었다. 바스티안은 하얀 문을 택했다.
그 다음 방에는 노란빛이 가득했다. 벽은 똑같이 배치되어 있었다. (~생략) 두 개의 문은 똑같이 노란 색이었지만, 왼쪽은 높으면서 좁고, 오른쪽은 낮고 넓었다.(~ 생략)
'바스티안'이 어떤 문이든 선택을 하고 새로운 방으로 들어서면 그때마다 새로 선택해야 하는 문들이 나오는데, 두 개의 문은 공통점이 많으면서도 근본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크기, 색, 재료, 모양 중 하나씩은 다른 점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우리 인생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의 어려움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게는 물건을 사거나 약속 장소, 먹을 것을 정할 때도 선택지들의 장단점이 확실하지 않아 망설이게 되고, 중요한 큰 결정거리도 두 가지 중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느 한쪽에 좋은 조건들이 다 몰려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선택이 쉽지가 않다.
'바스티안'은 천 개의 문이 있는 사원에서 계속 끊임없이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선택하면서도 그 안에 빠져있었다. 왜 ‘바스티안’은 그렇게 많은 문을 열면서도 사원을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바스티안'은 고민하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문 하나씩을 선택했다. 어쩌면 매번 다른 문을 선택했을 수도 있었고 그랬다 해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것들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삶을 사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매번 어떤 선택을 하지만 자신이 살던 습관대로 선택을 하고 그 안에서 맴을 돌게 된다.
그 미궁에서 빠져나오려면 분명한 목표, 간절함이 있어야만 했다. 수많은 문을 선택하고, 결정하며 여러 개의 방을 지나온 ‘바스티안’은 차츰 그것을 깨달으며 '아트레유'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문을 선택하고 결국 천 개 문의 사원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어떤 친구가 요즘 생활이 너무 힘드나보다. 자신은 마치 '시지프스'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시지프스'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영겁의 형벌을 받고 있는 중일 터인데, 그와 같다니 마음이 아프다. 친구가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나 인간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는 '시지프스'는 '제우스'나 '헤르메스' 등에게 밉보여 괘씸죄가 더해지기도 했지만, 마치 우리 신화에 나오는 '동방삭이'처럼 죽음을 피하려는 선택을 했다가 신들에게 그런 벌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입원하신 시어머니 때문에 보게 된 100세를 넘겼거나 100세 가까운 노인들의 모습은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다. 의식과 몸이 함께 가지 못하니 그 혼란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해도, ‘시지프스’가 받는 형벌 못지않은 형벌로 느껴졌다. 물론 그분들이 장수를 선택해서 그리된 것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안타까웠다. 내가 죽음과 병듦에 대한 선택의 문 앞에 서 있다면, 나는 기꺼이 죽음의 문을 열 것이다. '미하엘 엔데'의 또 다른 책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에 나오는 오필리아처럼. 그것은 오히려 쉬운 선택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삶이 '시지프스' 가 겪는 형벌 같다면, 간절함으로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스티안'이 그 문을 열고 나아갔듯이 분명 나도 친구도, 우리 모두 그런 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을 찾는 간절함으로 용기를 내고, 그 용기로 가능성을 열게 되는 신화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