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최종 학력이 어디?"
"인생학교요~ "
그렇습니다. 50+인생학교 동기들을 만나면 심심찮게 들리는 문답이죠. 입학식에서 학장님이 분명 나이를 밝히지 말라고 했건만 어떻게들 아는지 서로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는 분들이 기분 좋으면 하는 말입니다. 최종학력이 인생학교라니 이 보다 더 근사한 학벌이 있을까요. 앞서 달리는 시간 덕에 어느 새 선배 기수와 같은 수의 후배가 생겼습니다.
'인생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안전한 공간'이었습니다. 나이도 학벌도 사회에서의 지위도 묻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검은 머리칼보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오직 별명으로 부르고 불리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인생후반부는 선배시민으로서 의식을 갖고 긴 호흡으로 함께 가야 한다." 고 강조한 학장님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선생님으로 등장한 후 내 마음에 담겨있던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이었습니다. 부드러움과 카리스마가 공존하는 부학장님의 '경청(傾聽)'에 대한 수업도 마음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함께 보고 연극을 했으며 머리를 맞대고 열띤 토론도 했습니다. 아스라한 세월 저 편 내안의 잠든 아이가 깨어났는지 '응답하라 1988'에 배경음악으로 나온 '청춘' 영상을 볼 때는 울컥 눈물이 나왔습니다. 청춘을 쥐고 있는 김필과 청춘을 보내버린 김창완이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애달파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습니다. 이 노래가 슬픈 노래였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나를 두고 간님은 용서하겠지만/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정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 동산 찾는가/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 청춘 / 김필,김창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확신한 일이 오늘 살아보니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 하루 더 지나보면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훅 하고 한순간 깨닫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각자의 호기심으로 '50+인생학교'를 찾은 우리는 허물없는 사이는 아닌, 그렇다고 어색한 사이도 아닌, 적당한 배려와 존중으로 서로를 대하는 특별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인생학교라는 명칭에 걸맞게 여전히 인생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에는 서부, 중부, 남부 세 개의 캠퍼스 수료생이 모인 총동문 체육대회가 열렸어요. 지칠 때 어깨동무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길 따라 걷기를 좋아합니다. 친정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 십여 년 전부터 시작한 거 같아요. 아이들이 학교에 간 오전이면 배낭을 메고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코스는 그때그때 달랐어요. 생각을 정리해야할 때는 적당히 한적하고 새가 지저귀는 오솔길을 택해 걸었습니다. 하늘로 높이 솟은 나무 사이 좁은 오솔길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참 좋습니다. 오랜 낙엽으로 푹신한 흙길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잔돌을 보면서 ‘이것이 인생이지’하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뿌리를 드러내고도 끝없이 새순을 내놓는 나무를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배우기도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구멍이 송송 뚫릴 만큼 오래 살아온 바위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만져봅니다. 올록볼록 숨겨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모서리가 둥글게 닳도록 긴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요. '애썼다 애썼어! 여기까지 오느라 애 많이 썼어.' 기특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줍니다.
어떻게도 정리할 수 없는 잡다한 생각이 많을 때면 집중력이 필요한 가파른 바윗길을 택해 걷습니다. 길이 위험해서 오직 산행에만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잡다한 생각이 날아가 버립니다.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은 희망을 심어줍니다. 모퉁이를 막 돌아서 만나는 바람 한 점은 얼마나 고마운지요. 온갖 근심을 날려버리는 꿀 바람입니다. 등에 얹힌 삶의 무게가 희망이 됩니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길 여행은 인생을 닮았습니다. 걷다가 불쑥 튀어나온 바위도 만나고 바람 한 점 없이 건조한 흙길도 만납니다. 흐르는 땀을 옷깃에 쓱 닦다가 졸졸 시냇물을 만나면 손가락으로 물을 튕기며 쉬기도 하구요. 서로 다른 인생길 조금 더디 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각자의 보폭으로 방향을 잡아 걸으면 됩니다. 어느 길에서 어떤 행운을 만날지 그 누가 알까요.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행복이 앞문으로 나가면 기다리고 있던 다른 행복이 뒷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나간 행복만 바라보며 슬퍼하다가 뒤따라온 행복을 못 보고 놓쳐버린다고 해요. 앞 서 걸은 이가 미처 보지 못 한 행운을 느리게 걷고 있던 당신이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학교’는 느리게 걷던 내가 발견한 행운입니다.
홀로 걷다가 우연히 두드린 인생학교에서 함께 걸어줄 동기들을 만났습니다. 작게는 수십 명 크게는 수백 명의 친구가 될 동문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무수히 확장될 인생 후반기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곧 여행을 갈 거예요. ‘사기충천’이 우리 기수를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둘러보면 한 사람 한 사람 참 열심히도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정답 없는 학교에서 어느 것을 내려놓고 어느 것을 소중히 안아야 하는지 알아가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마음을 열어 그랬구나! 하는, 안전한 공간의 특별한 모임. 사방이 탁 트인 여행길에서도 우리는 외칠 겁니다.
“우리의 최종 학력은 어디라고?”
“인생학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