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손웅익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이 서울로 이사 왔다. 처음 이사 온 곳이 제기동이었고, 주인집 할아버지가 한의사였다. 솜을 트는 작은 가게가 길가에 붙어있는 한옥이었는데 그 집 방 한 칸을 얻어서 온 가족이 살았다. 두 번째 집도 한옥이었는 데 집이 커서 세 들어 사는 가구가 많았다. 4학년 때 면목동으로 이사해서 용마산 기슭에서 살았다. 그 곳도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사는 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폭포공원으로 변신한 중곡동 석산 바로 아래에 방하나 부엌 하나 판자 집을 지어서 이사했다. 그렇게 이사 다니는 동안 방 하나에 온 가족이 생활했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작은 단독주택 으로 이사했고 내 방이 하나 생겼다. 그 집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안방과 작은 방이 두 개 있었다. 여동생들이 쓰는 방은 마당에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아마 별도로 세를 놓을 수 있는 구조로 지어진 모양이었다.
부엌도 마당에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안방과 내 방은 마루에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내 방 옆에 작은 가게가 붙어 있었다. 내 방은 마루에서 들어갈 수도 있고, 가게에서도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이 두 군데 있었다. 어머니는 과자 종류를 떼어다가 파셨다. 가게와 연결된 내 방엔 항상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노는 장소였다.
게다가 시골에서 서울에 공부하러 오거나 취직하러 오는 친척들이 몇 달씩 머물고 가는 숙소로 늘 사용되었다. 둘이 누우면 꽉 찰 정도의 작은 방에 책상 하나와 작은 옷장 하나가 있었다.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나이도 다르고 생활 리듬도 맞지 않아서 방을 같이 쓰는 것이 영 불편했다. 그렇게 몇 달 지내다가 떠나면 다른 친척이 또 들어왔다.
우리 집이 서울에 제일 먼저 이사 와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어머니께서 그냥 다 포용하시고 챙겨 주시는 성격이라 친척들이 부담 없이 자녀를 맡긴 이유도 있을 것이다. 친척들 간에 소문이 나서 자리가 나면 바로바로 다음 친척이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그들이 적당한 곳으로 떠나기 전까지 자식처럼 챙겨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돈 한 푼 안 받고, 그렇게 친척들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중랑천 뚝방을 따라 판자 집이 빽빽하게 지어져 있었다.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빈 땅이 있으면 작은 판자 집을 계속 지어나갔다. 처음 지어진 집은 안쪽에 있어서 찾아 들어가려면 골목을 이리저리 돌고 돌아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동네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몸이 안 좋으셨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 친구의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가난한 집이 더 가난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업을 포기한 그는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일을 하러 다녔다. 내가 고3이 되고 대학입시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신문을 돌리고, 독서실에서 청소일 하면서 먹고 잔다는 소문을 들었 다. 입시가 끝나고 그 친구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해서 찾아 간 독서실 작은 방에서 그는 영양실조로 누워있었다. 몇 개월 동안 라면만 먹고 살았다고 했다. 그 친구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당장 집으로 데려 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내 방을 같이 쓰게 되었다. 우리 집에 왔을 때 그의 건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성껏 간호하고 밥을 챙겨 주셨다. 그 친구의 내의 빨래도 다 해주셨다. 어머니가 참 편안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의를 내 놓을 수 있었다고 나중에 그 친구가 회상한 적이 있다. 그렇게 몇 달 지 내는 동안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우리 집을 떠났다. 그 이후 그는 신문 지국장이 되었다. 가난하고 고아라는 이유로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의 집안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여자 친구는 친정부모와 절연하고 친구와 결혼했다.
아들을 얻고 둘이 억척의 삶을 살아 남 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그렇게 성공한 그는 명절이면 온 가족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왔다. 어머니께 자기가 큰 아들이라고 하면서 재롱을 부리면, 어머니는 큰 아들 자리는 내어 줄 수 없고 둘째 아들 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그 친구는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 소식을 들으신 어머니는 땅이 꺼질 듯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셨다.
이제 연로하셔서 멀리 사는 친척들 대소사에 자주 다니시지 못하므로 내가 부모님을 대신해서 친척들 대소사에 다닌 다. 그 시절 우리 집에 잠시 머물고 떠났던 친척들은 나를 붙잡고 어머니 만난 듯 반가워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몇 달씩 방을 같이 썼으면 한두 가지 에피소드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내 성격이 지독히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다. 아마도 방을 같이 쓰면서도 나하고 거의 말을 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심한 방주인이 좀 불편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머물다가 떠난 친척들은 이제 손자를 볼 나이가 되었다. 서울이 생소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던 어린 시절에 마음 편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이 그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그들이 내의까지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성격이셨다.
이 시대 우리는 함께 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언제 부턴가 타인과 같이하고 공유하는 것이 불편해졌고,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시니어들이 공동체주거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한다. 결국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불안이 함께 사는 데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그랬듯이 우리는 오랜 세월 타인들과 여러 가지를 공유하면서 살았다. 돌이켜 보니 우리가 셋방 생활을 할 때는 집 주인들이 다 좋았다. 세 들어 사는 사람들 간에도 친하게 지냈고,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 집에서 잠시 살다간 친척들도 어머니 덕분에 편하게 지내다 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는 구성원도 중요하지만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모든 구성원이 리더가 될 수는 없지만 누가 좋은 리더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좋은 리더와 함께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면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손웅익
건축사. 수필가.
더함플러스협동조합에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살아있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 주거단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서울시50플러스 포털에 '별별집 이야기'를 쓰고, 중앙일보(더. 오래)에 '작은집 이야기'를 쓰고 있다. 산과 들을 무작정 산책하기를 즐기며, 사진과 그림으로 자연의 의미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