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원하숙
응답하라 기억의 저편이여
기억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린 시절 동심의 순간은 찰나의 순간처럼 아련하다. 그 찰나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 다. 소박한 아름다움 속에 웃음소리가 있었고 정이 있었다. “ 응답하라 1988”을 생각하게 하는 골목은 나의 성장에도 있 었고 내 이웃의 가슴에도 남아 있다. 내 부모님에게는 식구 많은 설움을 종식시켜준 그 곳. 6남매의 회오리 같은 성장이 있었던 그 곳. 시대의 변화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그 곳. 이미 사라져간 골목길의 풍경은 내게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웃은 화장하지 않고 입던 옷 그대로 나갈 수 있는 범위”라고 누군가 정의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열 가구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마주보았다. 아이들이 폴짝 뛰어 오르면 그 집 마당을 볼 수 있는 정도의 낮은 담과 기왓장들이 나란히 존재한다. 어른들은 이웃들의 출입에도 관심가지며 누구네 아들딸인 것도 안다.
골목길 어귀에는 양장점 하나가 있는데, 그 곳에서 동네 여자 아이들이 똑같은 세라복과 판탈롱 바지를 맞추어 입기도 했다. 택시 운전하는 이웃 아저씨가 있었다. 자가용이 귀한 시절, 아저씨는 자신의 아이를 포함해 10여명의 동네 아이들을 기적처럼 태워 드라이브를 시켜 주었다. 좁아도 불편해도 마냥 신이 났다. 그야말로 행복을 실어 나르는 택시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는 나라가 부유하지 못해 분식과 보리혼합식을 강조했다. 가끔 이웃집 마당에서 수제비를 한 솥 끓이면, 동네잔치처럼 모여서 식사를 한다. 정신없이 먹어대는 아이들을 향해 “밀가루 음식은 배가 빨리 꺼지니 꼭 한 그릇 더 먹어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그 때 전쟁처럼 먹었던 수제비는 지금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음식이다.
아침이면 거지가 깡통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녔고, 넝마주이도 흔했다. 새마을 운동으로 많은 것이 달라져 갔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노래차가 새벽을 깨운다.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은 빗자루 들고 게임하듯 골목을 쓸었다. 어느 날부터 흙바닥은 콘크리트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이들 소리는 언제나 골목을 꽉 채운다. 땅따먹기, 깡통 차기, 시차기, 신발던지기, 고무줄, 줄넘기. 짓궂은 남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노는 고무줄을 칼로 끊어버리고 도망간다. 쫓아가는 여자 애들 목소리가 커진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은 으르렁거리며 원수처럼 싸운다. 그러나 진짜 원수 되는 일은 없다.
좁은 골목에서 즐겨 치는 배드민턴공이 이웃집 기와지붕으로 올라가는 일도 다반사다. 낡은 기왓장을 밟고 공을 건지려 하다보면 우지직 소리가 난다. 들키는 날엔 어른들의 고성은 한 옥타브를 넘어간다. 입시 공부하는 언니 오빠들이 조용히 하라고 뛰쳐나오는 일도 허다했다. 골목이 어둑어둑해질 때면 집집마다 붉은 전구가 불을 밝힌다. “밥 먹어라” 집집마다 들려오는 엄마들의 고함 소리에 하나 둘 집으로 간다.
대문을 열고
대문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은 연탄창고와 함께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다.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으흐흐.” 를 생각하면 밤에는 아무리 급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밤이면 요강이 마루에 등장한다. 대문 왼쪽에는 부엌 딸린 방이 한 칸 있다. 그 곳엔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자 친구가 살았다. 전세를 살고 있지만 식구 많은 우리 가족보다 우아한 생활을 한다고 자부한다. 그 집은 본채의 마루와 연결되는 문칸 방이다.
남매뿐인 친구는 객식구까지 득실거리는 우리 집 밥상을 부러워했다. 쌀밥 먹는 자기네 식단보다 보리밥 섞인 우리 집밥이 더 맛있다하여 종종 같이 먹었다. 아마도 밥보다는 사람이 그리워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의 거실 같은 중간 방에서 15명 내외의 밥상을 차린다. 상만 해도 세 개다. 마루까지 밥상을 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엄마는 항상 나중에 먹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코 박고 정신없이 먹느라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일들이 참 많다.
친구 오빠는 엉뚱한 행동을 많이 했다. 오빠는 닭울음소리를 잘 내었다. 진짜 같은 그 소리는 새벽이면 더욱 헷갈린다. 방에서 들리면 가짜라고 생각한다. 자존심 강한 친구엄마는 오빠의 공부 때문에 화를 자주 내었다. 야단맞을 때마다 마루로 도망 나온 친구와 숨죽이며 몰래 들었던 기억이 생생 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서 닭울음소리를 내는 오빠 때문에 자주 웃곤 했다.
TV가 귀하던 그 시절, 문 달린 TV상자는 우리에게 너무나 신비한 물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속에 사람이 어떻게 들어 있는지 한참 만져보며 들어갈 방법을 궁리해 본 적도 있다. 드라마가 시작할 때면 친구들은 우리 집 마루에 다시 모인다. 그 때 그 시절 국민드라마 “여로”와 “팔도강산”은 우리의 눈물콧물을 자아내게 했다. 처음으로 사람이 달에 도착한 아폴로 11호 발사 장면은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다. 집집마다 TV가 늘어나면서 이런 공유 문화는 점점 사라져 갔다.
주택에 살면 도둑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단골손님 같은 좀 도둑에 대한 트라우마는 많은 해프닝을 가져다 주었다. 셋째 오빠가 하루는 도둑 잡겠다고 다락방에서 방망이를 안고 자다 꿈을 꾸었다. “도둑이야”라는 잠꼬대에 온 식구가 잠을 깼다. 정작으로 도둑은 소리 없이 잘 다녀간다. 도둑이 다녀 가면 표시로 지붕 위에 변으로 흔적을 남긴다. TV, 시계, 라디오, 옷, 신발 심지어 속옷까지 가져간다. 그래서 집에는 누군가 꼭 한 명이라도 집을 지켜야 했다. 아파트는 이런 문제에서 확실히 해방을 시켜 주었다.
맥가이버 아버지
어린 시절 어느 날, 흙바닥의 마당이 시멘트로 말끔하게 바뀌었다. 마중물 부어 펌프질 하는 대신, 수도꼭지가 생기고 커다란 콘크리트 물탱크가 만들어졌다. 물이 없을 땐 숨바꼭질 공간도 된다. 그 곳에 나무뚜껑을 덮으면 숨기 딱 좋은 곳이다. 아늑하기까지 하다. 이 모두는 아버지가 직접 만드셨다.
마당 한 편에는 ‘아버지의 나무’가 있다. 어딜 이사 가더라도 아버지는 장미와 무화과를 심으셨다. 그래서 난 ‘아버지의 나무’라고 부른다. 화단에는 아버지의 정성은 언제나 개와 고양이들과 협업한다.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집에 잠시 쉬시는 동안, 학생들에게 가르쳐 준 바느질을 내게도 가르쳐 주셨다. 난 그 덕에 틈만 나면 엄마의 가게에서 가져 온 자투리 천 자락으로 인형 옷을 만들었다. 바쁜 엄마보다 아버지에게 배운 생활의 지혜가 훨씬 많았다.
도배 하는 날이면 식구들이 총출동한다. 아버지께서 도배지를 재단하고 자르면 우리는 밀가루 풀칠하고 초배지 붙인 후 아래 위로 붙잡아 몇 번을 붙였다 뗐다 하며 붙여 나간다. 무늬까지 맞추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린다. 종이가 약해 찢어질 때도 많다. 바닥도 두꺼운 종이장판을 붙여 들기름으로 몇 번 칠하면 황토색으로 바뀐다. 예뻐지는 집을 위해 나는 한껏 들떠 거들었다.
어느 날 마당 한 쪽에 할머니 방이 생겼다. 큰 아버지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떠나자 우리 집에 오시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그 방을 직접 만드셨다. 블록 쌓고 시멘트 바르고 도배와 장판작업을 나도 열심히 도왔다. 아버지는 하나하나 그것을 찬찬히 가르쳐 주셨다.
여름이면 할머니 방 지붕은 우리 가족의 또 다른 놀이터가 되었다. 돗자리와 이불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함께 사는 고모뻘 친척의 귀신이야기를 듣는다. 무섭지만 자꾸 해달라고 조른다. 그 때 들은 별 이야기와 멋진 노래는 지금도 가슴 속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있다. “희망의 나라로”, “오빠 생각”, “봄 처녀” 등은 우리의 애창곡이 되었다.
도심공동화
대도시 한복판, 우리 집은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찻길 건너편에 있는 조선 방직 공장부지는 기업들의 로망이었을 것이다. 공터로 있는 동안 우리는 그곳에서 축구도 하고, 약장수들의 재담과 묘기를 볼 수 있는 재미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을 가려면 신호등 없는 찻길을 건너가야 한다. 차량은 점차 늘어났다. 점점 목숨 걸고 건널 일이 많아져 갔다. 하루는 그대로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행렬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대통령의 키가 참 작다’는 생각을 했다.
집들은 하나, 둘 상업지로 바뀌어 갔다. 골목길 어귀에 새 건물이 들어오면 점차 길의 폭이 줄어들어 갔다. 은근 슬쩍 골목길을 잠식해가는 새 주인들과 기존의 주민들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낯선 사람들의 얼굴로 대체되는 동네는 점차 말이 없어지고 삭막해져 갔다. 우리 집의 형태도 여러 번 바뀌 었다. 오빠들이 각각 군대와 대학이 있는 서울로 떠나고 객식구들도 다 떠났다. 남는 방은 가게로 변신했다. 큰 방을 가게로 내어주니 막힌 방문을 보노라면 집안에서의 단절을 경험했다.
가만 두어도 아프고 외로운 나의 사춘기는 자존감이 낮아져 갔다. 빌딩으로 잠식되어가는 우리 집에 친구초대가 싫어졌다. 바다 가까운 신흥주택가로 이사 간 친구들이 마냥 부러 웠다. 부산에 아파트가 귀한 그 시절, 고등학교 진학 후 친구네를 놀러 갔다. 그 집은 내게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아파트에 대한 로망으로 마음의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엄마에게 “우리도 이사 가요”라 노래 불렀다. 그러면 “이사가 지겨워 싫다”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아버지의 전근 후유증이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실상 그 집은 엄마에겐 다른 의미가 존재함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서러운 셋방살이 마감시킨 집’이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쌀 한가마니가 바닥나던 그 시절, 굶지 않고 빚지지 않고, 자녀들 대학 뒷바라지하고, 며느리까지 맞이하여 첫 손녀도 태어난 집에 대한 애틋함. 지금은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다.
한참 마음의 몸살을 앓던 17살의 꿈 많던 소녀는 드디어 한적한 주택가의 새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아쉬워하는 엄마를 위해 손을 잡고 위로했다. “크면 꼭 다시 이 집 사서 엄마에게 선물할게요.” 대지 33평의 건평 28평의 단층집은 트랜스포머를 연상케 했고 엄청난 사람들을 품었었다. 집은 구석구석마다 아버지의 손길과 가르침이 있었고, 오빠들의 요란한 ‘성장통’이 있었다. 떠나려니 어린 시절의 집이 지닌 의미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유럽 여행 중 가이드가 한 말이 있다. “유럽은 몇 백년 전의 사람이 살아 돌아와도 자기 집을 찾아 갈 수가 있다.” 이 후 나의 어린 시절 집을 찾았을 때는 굴착기가 이미 삼켜버렸다. 동네는 빌딩숲으로 변했다. 약속 대신 엄마의 암 치료를 위해 좋은 공기 마실 수 있는 집을 사드리고 싶었지만, 딸의 소망을 뒤로 한 채 수술 후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파트 이력서
결혼생활은 드디어 아파트로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식 신축아파트의 4층. 사실 결혼 전 시어머니가 나만 따로 불러 요구했다. “너희 시누이는 23평에 살아보니 좁다더라.”며 큰 평수의 집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경상도 풍습은 집과 장롱을 남자 쪽에서 준비하는데, 그 어느 것도 해주지 않았다. 난 그 일로 “결혼 할 수 없다”고 폭 탄선언을 했지만, 친정 엄마의 만류로 작은 아파트를 구하게 된 것이다.
시어머님은 당당한 요구는 내가 어딘가 부족한 존재로 만들었다. 좋은 혼처 마다하고 연예결혼 하는데 왜 이런 요구에 응해야 하는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부당했다. 집에 대한 로망은 이 기분 때문에 망쳐지곤 했다. 소위 말하는 열쇠 3개를 요구받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학원과 직장을 겸했던 나는 임신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대식구에서 갑자기 떨어져 나온 나는 남편의 부재가 컸다. 병원인턴 근무로 집에 못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다 해가 지면 그대로 큰 방 한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캄캄한 두 개의 방은 두려움이 되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새집증후군과 가구에 발린 화학 냄새는 내게 엄청난 고통을 유발시켰다. 입덧과 외로움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예고하지 않은 시댁식구들의 갑작스런 출현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교사인 시누이의 이웃에 집을 구하다 보니 조카들을 돌보아야 하다 보니 육체도 힘이 들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준비물, 과제수행보조 등등. 새를 키우는 앞집 아주머니의 위로는 한 줄기 빛이었다.
80년대 중반의 부산에 대단지 아파트가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군의관으로 출퇴근하는 남편이 좀 더 편하도록 부산 서쪽 경계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 매매 대금으로 이사 간 곳 근처에 브랜드아파트 입주권을 샀다. 집을 팔아 버리니 주변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심지어 ‘복부인’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생 한 곳을 사는 시댁식구들의 성향과 나는 많이 달랐 다. 이사 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다양한 집에 살고 싶은 것이 나였다. 시댁은 거제도 내륙에서 평생 한 동네 한 집에서 사시는 분들이다. 아버님은 당신이 졸업하신 초등학교에 교장으로 퇴임하셨다. 어머님은 그 곳에 시집가서 그 집에서 살림 일으키고 세운 분이다. 아버님과 형제, 동네 친척들은 모두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다. 지금까지도 부산에 나와 사는 남매들 모두 거의 이사를 하지 않고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문화다.
그러나 정작으로 남편의 직장 이동으로 그 아파트는 살아 보지도 못하고,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다. 사고팔고 하는 과정에서 이래저래 시댁식구들은 나를 이해 못했다. 집을 겁 없이 사고파는 간 큰 며느리였다.
부산 30년의 마감
서울 생활 시작 서울의 첫 집은 ‘설레임’이었다. 어릴 때 지방에서는 서울에 산다는 것 자체가 출세라는 좋은 편견이 있었다. 그런 만큼 지방의 열등의식도 작용했다. 남편 직장 근처의 집을 보지 않고 구했다. 아니 볼 수도 없었다. 2월은 학군 영향으로 집이 없다는 것이다. 세입자가 보여주지 않으면 집을 보지 않고도 계약한다는 불문율 같은 것도 존재했다.
첫 서울살이 환상은 보기 좋게 깨어졌다. 잔금을 미리 주지 않았다고 전 세입자가 열쇠를 가져 가버리고 이사한 것이다. 그 시대에 지방에서 온라인 송금은 용이하지 않아 수표를 가지고 올라온 상황이었다. 눈은 펑펑 내리는데 짐을 풀지 못했다.
이삿짐을 던지다시피 하는 아저씨들을 달래가며 해가 다 진후에야 짐을 내렸다. 집안은 가관이었다. 낙서로 가득한 벽지로 심란했다. 부산은 세입자가 요구하면 도배, 장판을 해주는 관행이 있다. 수도권은 소모품이 아니더라도 인테리어비용 등을 세입자가 하는 거란다. 주택문화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두 칸으로 줄어든 방의 가구 배치로 고민하니 남편은 “머리에 이고 살아야겠다.”고 농담했다. 오히려 넘치는 가구로 낙서를 다 가려져 버렸다.
처음 살아 보는 복도식 아파트는 골목이 있는 동네 같았다. 우리 두 아들과 비슷한 또래가 많았다. 아랫집의 아량 덕으로 층간소음에 대한 분쟁도 없이 살았다. 옆집은 물론 아래 위층까지 돌아가며 한 집에 모여 수다 떨고 밥도 먹었다. 계모임처럼 돈을 모아 필요한 물건도 샀다.
2년 계약이 끝나자 ‘서울인심 한 번 고약하다’는 생각을 뒤로하고 근처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곳에도 좋은 이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서로 비슷하게 입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니, 모두가 선한 이웃의 문화를 만드는 주인공들이었다. 같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보내는 학부형들의 모임은 ‘두레’ 같은 모임을 가능케 했다. 아프면 병원 가는 것 도와주고 음식도 해다 주었다. 우리 막내의 백일과 돌잔치까지 도와주고, 동네 아이들 다 데리고 소풍도 갔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까지는 이런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실없는 수다로 세월을 보내는 것 아닌가’하는 회의도 들었다. 그러나 그 때만큼 이웃을 순수하게 바라 볼 때가 없었고, 아이들 성적으로 비교하지 않고 서로를 응원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다. 다양한 협업과 정보는 서로에게 힐링이 되었고,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먼 친척보다 나은 이웃’을 가능케 했다. 외로운 서울생활은 아이들에겐 이모, 고모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이 있어서 참 행복했다.
그들로 인해 경력 단절이던 나의 생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웃아이들을 단체로 모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교육교사생활을 시작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아파트 문을 활짝 열고 살았다. 1층에 사는 동안은 실내놀이터처럼 대여한 실내 미끄럼틀과 꼬마 차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심지어 우산도 빌려주고, 화장실이 급한 사람에게도 허용을 했다. 공동체가 무엇인지 의식도 하지 않은 채, 난 그것을 실현 하고 있었다.
전세를 살아도 늘려가라
아쉽게도 살고 있던 집이 팔려 조금 떨어진 새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웃도 신도시 아파트로 하나, 둘 떠나고 변화를 맞이했다. “전세를 살아도 조금씩 늘려가라”는 친구의 충고로 차츰 집의 크기는 커져갔다. 그러나 그 곳의 분위기는 왠지 삭막했다. 정은 없고 의무만 있는 곳에 분리수거 문제로 모두들 힘들어 했다. 전과 같은 사람 사는 분위기는 갈등으로 대체해 나갔다. 분명히 아파트는 더 좋아졌는데.
IMF로 집 팔기도 사기도 힘들 때, 손해를 안고 판 집 대신 학원가 아파트 42평을 구매했다. 11% 넘는 고리의 대출을 받아 구입한 이유는 큰 아들의 여린 성격 때문이었다. 일진없는 안전한 학교와 3남매의 공부방도 필요했다. 그 덕에 집값은 올랐다.
그러나 아쉬움도 따라왔다. 공부를 해야 할 시기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문화가 점점 줄기 시작했다. 하나씩 차지한 자기 방의 두께만큼 단절은 늘고 가족 모두의 추억은 줄어들 었다. 점차 같은 공간의 세 아이들은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기 시작했다.
막내딸의 집중도에도 살짝 문제를 느꼈다. 넓은 방을 차지하여 오빠들 쓰지 않는 책과 물건들을 딸의 방에 두니 주변이 산만했나 보다. 넓은 공간만큼 어질러 놓고 치우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방의 크기와 집중도에 상관 관계가 있음을 느꼈다.
학원가 동네는 온갖 소문이 난무한다. 자녀들의 학업에 맹목적이고, 엘리베이터에서 자녀 또래 아이의 점수를 묻는 일 도 생겨났다. 이웃이라기보다 경쟁자들이었다. 아이들에게 친구보다 경쟁자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진실보다 소문이 난무했고, 점수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의 안타까운 소식도 여러 번 접했다. “학생을 키우려면 높은 층에 살면 안 되겠다”는 말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집값 내려간다고 쉬쉬하며, 소문은 생각보다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묻혔다.
밤이 되면 불야성을 이루는 동네는 학부형들의 상시 대기하는 24시간 커피숍과 각종 음식점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의 끼니를 위한 각종 인스턴트 음식점은 늘고, 학생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폭력도 자주 일어났다. 저녁 시간은 학원 버스로 뒤덮여 아파트 출입구를 막는 것은 다반사다. 집값은 학기가 바뀔 때면 출렁거렸다.
결핍이 안겨다 준 꿈
지금은 모두가 출퇴근이 용이하다는 역세권으로 이사했다. 이전에 늘 유리로 만든 집을 꿈꾸어 왔다. 드디어 하늘창이 있고, 방마다 큰 유리창이 있는 펜트하우스에 살게 되었 다. 장미를 심을 수 있는 큰 마당 같은 베란다도 있고 두개의 산이 바라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리마다 새어 나가는 열효율이 문제와 주변 환경을 간과하는 실수도 했다. 분양 전 현장 확인도 안했다. 생각했던 장소와 입주할 장소의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세대수가 적은 ‘나홀로 아파트’를 선택한 것도 실수다. 라이프 사이클과 인구변화에 따른 집 크기 조절 시기도 놓쳤다.
여러 가지로 섬세하지 못한 집 구입에 따른 대가는 컸다. 자식들이 지속적으로 같이 살 것 같은 착각이나 떠나더라도 우리와 자주 머무를 것이란 생각도 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집을 내어 놓아도 잘 팔리지 않는 큰 평수와 인근 무단주차로 혼란스러웠다. 한 마디로 재테크로는 실패한 아파트였다.
다행히 세 아이들은 이 집에서 멋진 성인이 되었고, 자격 시험마다 합격 후, 각자 직장과 꿈을 향한 학업을 하게 되었 다. 한 아들이 결혼도 하여 손자가 곧 태어나게 된다. 그래도 나는 손자를 위해 베란다 마당 곳곳에 장난감을 마련했다. 내가 할머니가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며 날이 갈수록 친정엄마를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선택을 잘못한 이집이 좋아졌다. 명절은 물론이고 늘 북적거리는 시장 속 아파트는 날마다 장날이다. 영국인 조카사위는 이 집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국을 이해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뉴질랜드에 사는 오빠는 있을 것 다 있고, 나가기면 하면 ‘맛집’이 늘려 있어 나이 든 사람 살기에 그저 그만이라고 했다. 6개월씩 집을 바꾸어 살자고 한다. 돈으로만 말할 수 없는 집의 가치가 타인의 눈에는 잘도 보이나 보다.
집이란 무엇일까
집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등을 막으려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또 그 수를 세는 단위이고,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집안을 뜻하기도 하다. 제비집, 개집, 개미집, 벌집처럼 동물이 사는 집도 집이라 부른다.
사람에게 ‘집다운 집’이란 무엇일까. 때로는 거실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내다보며, 멋진 와인 잔 들고 음성 인식기에게 “ 지니야 음악 틀어줘”, “네, 주인님. 만족하셨나요. 또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며 인공시스템과 생활하는 꿈도 꾸어 본다. 그러나 영화<HER>에서 보듯, 마천루 같은 미래의 도시 한복판, 아무리 멋진 아파트의 생활이라도 기계와의 생활은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고통도 받지만 위로도 받는다. 그래서 난 여전히 소통하는 골목길 주택이나 공동체의 아파트를 그리워 한다. 어릴 적 나의 집은 나를 꿈꾸게 해주었고, 우리 형제 자매의 성장과 나의 엄마의 소망을 기억케 한다. 그리고 추억과 결핍은 내게 지금의 집에 대한 로망을 심어 주었고, 오늘의 집을 선물해 주었다.
한바탕 잔치 같은 지난 날들의 그리움.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의미가 있다. 집다운 집, 사람의 온기들이 가득 찬 곳 그곳. 시리도록 그리움을 간직한 나의 어린 시절 집은 한 바퀴 바람이 되어 돌아온다. 지금도 해마다 탐스런 장미를 볼 때면 마당에 서 계신 아버지 생각에 사무친다.
집은 생명을 잉태하고 사랑을 품고 또 때로는 울음소리, 웃음소리와 더불어 성장의 고통을 머금기도 한다. 단절이 아닌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즐거움이 있는 곳. 불편함은 있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추억이 되고 이야기거리가 탄생되는 곳. 그리고 용서가 있고 그런 집들의 공동체가 있는 곳. 나는 오늘도 ‘집다운 집’을 꿈꾸어 본다.
원하숙
나를 찾는 여행가로 행복과 여가, 기질과 성격 강의합니다. 50+ 생애설계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사진을 통한 인생 돌아보기 집단 상담을 좋아합니다. 지방의 50플러스의 문화 확산하기, 일본 50플러스의 트랜드 연구하기, 여가의 꽃 여행 동아리를 통한 활동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