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육선미
봄 아지랑이가 필 무렵은 논두렁길이 밤새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긴 진흙길을 만든다. 미끄덩거리는 그 길 끝에 커다란 방죽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집이 하나 어렴풋하다. 새벽공기는 언제나 오금을 저리게 했고, 방죽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어릴 적엔 무서웠던 고향집이다. 마당 한 켠에 할머니는 언제나 딸기를 심으셨다. 할아버지는 토끼사냥을 하러 나서시면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 뱀잡이를 해오셨고, 막내 삼촌은 나를 위해 소나무에 그네를 매달아 주었다.
불쏘시개에 걸려 나오는 군고구마를 굽던 저녁 아궁이, 할아버지 밥상에 올라간 노란 계란찜, 개구리를 잡아서 패대기 치던 시골 마당,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똑같지 않은 이야기가 소복히 내 기억을 깨운다.
특별한 주전부리는 아니어도 감꽃도 달게 먹었던 곳, 목걸이 주렁주렁 내 유년시절을 꿰어서 목에 걸었던 곳, 반 백년을 살면서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둥지의 흔적이다.
나에게 ‘집’이란 내 정서의 원천이며 내 살내음이다.
나에게 집이란 이야기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다.
지금은 고향터가 사라졌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적막한 좌절인가.
‘집’이란 눈이나 비를 피하는 동물이나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정의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집을 소유하는 것을 ‘ 잘 산다는 것’과 동급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집을 소유했다고 해서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인가?
상업적인 가치, 재산 가치로서만 그 범주를 정형화해 나가고 소유하는 것으로 ‘잘 사는 것’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은 속이 빈 길거리 공갈빵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강변에 즐비한 회색껍데기. 우리들의 이야기는 누가 훔쳐갔을까?
어릴 적 셋방살이에도 이야기는 있었다. 주인집의 눈치와 설움, 사글세를 만들어 가는 아비의 고달픔도 있었다. 물을 많이 쓴다, 전기를 많이 쓴다, 더럽고 치사한 셋방살이 탈출이 가장 큰 목표였을지 모른다.
집은 가장과 동일시 되는 이유들이 많이 있다.
집 한 칸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가 된 아비들, 폭폭한 삶이 녹녹치 않았기에 막걸리 한 사발에 무서운 아버지 상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목표만을 위해 살아내야 했던 가장들은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집은 소유했을지언정 관계는 “부재중”인 씁쓸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집에 가야지’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맞는 곳이 집이다.
이야기와 쉼, 그리고 응원, 격려, 소소한 행복, 함께 밥을 먹고, 살 부빔이 있는 곳.
그런 마음의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관계의 부재, 소통의 부재, 가족의 부재, 시대가 그려준 대로 살아내고 있다 보니 자기 삶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집은 외롭고 지칠 때 조용히 안아 줄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여야 한다. 언제나 찢기고 추울 때 돌아갈 곳이 있는 엄마 품이어야 한다.
가장은 가족을 품고, 가족은 온기를 품고 온기는 소소한 대화를 품고 소소한 대화는 내편을 품고, 내 편은 다시 에너지를 품게 된다.
언젠가 다큐프로그램에서 이웃과 함께 밥상을 나누는 싱글라이프들의 실험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개개인의 사연들로 혼자 살고 있는 참여자들 8명 정도의 남녀노소가 함께 식사를 하는 프로그램이였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타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마음의 문을 여는 시간을 함께 해가면서 귀를 내어주고, 가슴을 내어주고 편이 되어가는 뭉클한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본질적인 외로움 앞에 모두가 같은 생각과 같은 욕구들이 있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였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식구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혼밥, 혼술과 같은 새로운 변화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게 되고, 사회전반의 경제패턴까지 변화시켜 가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시끄럽다. 너무나 치열하고 복잡하다. 어쩌면 부재중인 내 안의 공간이 외롭고, 힘들고, 헛헛함이 견딜 수 없어 나오는 방어기제들은 아닐까? 내 집 하나 없이 사는 불안감보다는 혼자로 남는 불안감이 더 크지는 않을까?
나는 오래 전부터 소유에 대한 의식을 바꿨다. 사람에 대한 소유, 집에 대한 소유, 무엇하나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없다. 그것은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손에서 놓을 때, 나는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었고,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집이 있어도 내야 하는 월세, 집이 없어도 내야 하는 월세, 내 삶을 담보로 평생을 뛰어도, 나보다 더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과의 부질없는 싸움을 끝내고 싶다. 그리고 도시에서 남들과 똑같이 치열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딱 한번 집을 보고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정했다. 이유는 딱하나 커다란 창문이었다.
그 창에서 목련을 만났고, 그 창으로 산바람이 봄을 나르고 있었다.
작은집 안에 커다란 창 하나, 내 쉴 곳으로 충분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창은 내 에너지이고, 내 존재이고, 내 자존심이다.
적어도 남아있는 내 삶은 더 이상 “부재중”이 아닐 것이다.
나는 부자다. 내 기억 속 언덕엔 언제나 방죽이 보이는 초가집이 있고, 그 곳으로부터 오는 냄새와 소리를 즐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주인공이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짤막하고 함축된 글을 공유한다.
부재중
현대인의 집은 모두 부재중
티비와 스마트폰이 장악한 이야기가 사라진 집
가족도 눈 맞주침이 뻘쭘할 때 있다네
소통이 부재중
평생을 월세 같은 대출이자 갚지만
내 집이라 체면 서는 아버지
옛날 셋방살이 설움에
이를 물고 내 집 장만하리라
인생의 비장한 각오는
상업주의 주택시장에 피눈물이 널을 뛰는 세상
본질은 어디 갔을꼬
재산이 재산이 아닌 집
내 돈도 부재중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어디 가서 찾을까
“쉼”
“에너지”
“이야기”가 있는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곳
부재중인 본질의 우리들의 집에 온기를 지피자
육선미
그린에 올인하는 여인네입니다. 원예로 마음을 테라피하는 일을 합니다.
공예로 전문지도사를 양성합니다. 반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꺼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