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은총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행복한 사람들은 사회적 진화의 잔인한 법칙이 통과하는 지점을 벗어나 햇살 안에 서 있다. 마치 태풍의 눈 한 가운데 있는 듯이 고요한 삶을 영위하며. 잔혹한 진화 법칙이 수행된 지점을 자신이 완벽하게 피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알고 안도하거나, 혹은 그런 것에 무관하게 미시적 관점의 개인적 삶에 몰두해 있거나.
그러나 왜 나야? 하는 거부에서 시작하도록, 어느 날 비극 한가운데 놓인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게 마련이다. 이어 신을 향해 분노인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게 마련이다. 이어 신을 향해 분노하고, 악에 대해 질문하고,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삶의 총체성과 싸우고,자신에 대해서, 나아가 인간 전반의 정체성에 대해서, 주체건 타자건 인식하는 존재는 자신의 무지를 점차, 조금씩, 하나 하나,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깨달아가는 운명적 오디세이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스 비극이 하루 만에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하튼 그리스 비극은 그렇게 인과적, 윤리적 세계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심연을 돌연 무대로 올린다. 그리고 과감하게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올려야 하는 태생적 조건이 삶의전부인 양, 겉보기에 별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영웅적 인물에게 보석처럼 촘촘히 박힌, 외래적 악의로 결이 지어진 사회진화적 운명에 자신이 놓여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리스 비극은 의문투성이의 신학이 펼쳐지는 공간
이런 적대적 세계, 악의성, 초월적인 악한 힘, 배신의 원 안에 속한 절대자의 세계를 대척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그리스 비극에 대해 폴 리쾨르 (Paul Ricoeur) 는 의문투성이의 신학이 펼쳐지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영웅의 위대성과 악한 신이 대결할 때, 먼저 영웅의 자유의 저항이 있고, 이어 위대한 투쟁이 있지만 결국 운명이 그를 삼키고 말 때 우리 인간은 눈물짓는다. 그러나 인간이 초월적인 힘의 희생물임을 볼 때 생기는 이런 비극 감정은 사변을 요구하는 윤리적인 폭로나 교정, 인과 관계나 도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비극의 눈물은, 윤리 너머에 숨어 숨쉬고 있으면서 강력하게 인간의 내면적 운명의 숨통을 쥐고 있는 삶의 타자성을 목격한 공포에서 나오는 눈물이다. 잘 짜여진 인과성, 윤리성으로 삶을 도식해 보지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삶의 부조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리스 비극이 던져주는 눈물의 해방성이다.
운명과 자유의 변증법 속에서, 적대적인 초월 존재 앞에 선 영웅이, 자유를 통해 운명을 늦추지만, 멈칫거린 운명이 위기의 절정에 등장하여 결말을 짓는다. 영웅에 의해 늦춰진 운명은 우연한 모험처럼 다가와, 잔인함의 가면을 쓰고 비극적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필연과 우연을 불안하게 섞으며 기다리다가, 초월자의 배신처럼, 공포의 도가니가 되는 구조를 삶의 구조로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이런 비극적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절대 과거가 미래의 불확실성을 꼬리로 달고 있는 것처럼, 현장 속의 영웅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될 미래의 운명과 똑같이, 현재 상황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눈 먼 자이다. 사변이 필요없는이런 삶의 현장성 때문에,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고, 코러스와 관객의 동정을 얻으며, 현실 속에서 눈멀어 있는 우리의 눈물을 자아낸다.
오이디푸스는 잘못이 없다. 그는 결백하다. 그를 죄인으로 만든 것은, 아이스킬로스 (Aeschylos) 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집을 완전히 파괴하고 싶을 때, 인간에게 악을 심는‘ 바깥 존재인 신이다. 자기도 모르게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시비에 말려들어 부친을 살해하고, 스핑크스 수수께끼를 풀고,왕권을 거머쥠으로써 문명을 떠받치는 최대 금기 중 하나인 어미와 결혼하는 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존재!. 그렇게 운명에 대해 장님이었던 오이디푸스는‘ 모르고 지은 죄’로 인해 진짜 장님이 되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도, 안티고네도, 프로메테우스도, 햄릿도, 아가멤논도, 그리고 우리도 모두 무죄다. 인간의 유죄성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지어 신에게서 인간에게 옮긴 성서와 달리, 개인 내면에 또아리를 튼 악이 먼저가 아니라, 이브에 귓속을 어지럽힌 존재와 유사한 외부적 악이 선행했기 때문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히이드클리프가 죽음을 불사하고 지키려 했던 야생의 유년처럼, 우리는 그저 ‘악의 심연에 대한 속 깊은 체험‘을 하도록 강요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비극적 눈물의 요지이다. 비극작가들은 매우 깊숙하고 격렬한 서사를 통해 삶의 고뇌를, 운명의 여신이 자신의 왕국에서 쫒아낸 저주받은 자들이 우리임을 인식하게 한다. 뿌리깊은 악의 외면성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악마의 편에 속하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의 변명이다. 그래서 눈물 짓는다. 그렇다면 이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자에게 어떤 구원이라도 있을 것인가? 리쾨르는 덧붙인다. 비극적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은 비극적인 것 바깥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곧 이해하기 위해 고난당한다.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는길을 열어주어 이해하기 위해 고난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밝은 태양 아래에서 양심의 가책이라는 고통이 일고, 그 고통 속에서 고통을 무릎쓰고지혜가 생긴다. 파괴의 악의 반대편에 동시에 존재하는 신의 또 다른 속성이인간에게 가하는 덕스런 폭력에 해당한다. 우리의 자유 뒤에 숨어 있는 ‘적개심을 품은 운명’이 주는 고통을 통해 비극적 지혜, 비극적 지식, 비극적 화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장님이 되지만, 시력을 잃은 오이디푸스가 장님 예언자 티레시아스처럼 보는 자가 된다는 역설적 이해의 형식이 그리스 비극인 셈이다.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결론 아닌가? 그렇다. 그 이상으로 식상하고, 놀라울 정도로 통속적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이 통속성에 담긴 진실이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말인즉슨, 인지의 주체는 여전히 자신이 겪은 비극적 정신의 오디세이를 감행하면서도, 현장의 주체인 나의 육체는 오늘도 여전히 허기와 싸우기 위한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까닭에 변함없이 악의와 동맹을 맺고 매일 의 일상을 수행하는 비극 무대에 서 있다.
그리고 상상하기를, 매일 바위를 다시 산 위로 들어올려야 할 운명이라면, 하지 않으면 안될 그 일을 고통 속에서가 아니라, 웃으며 바위를 밀어 올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까뮈가 오늘의 종교가 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날 버린 남자같은 삶의 가혹한 타자성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비극적 화해에 이르렀지만, 육체는 50+의 지혜와 상관없이 매순간 길을 잃고 여전히 배가 고프다. 비극의 시적 진실만큼이나 멀리 나아가는 정신적 모험을 감행했음에도, 배고픈 육체의 명령에 복종하여, 범속하고 유혹이 없는, 참으로 숨막히게 잘 짜여진 노동 현장의 산문적 현실에 위태롭게 발걸음을 떼야 한다. 육체는 육체의 주 임무를 결코 잊지 않기에.
사랑하던 사람에 대한 추억과도 같은 삶의 제의와 무관하게, 육체는 오늘도 어김없이 노동 기계로서의 효용성을 뽐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의 비극 안에서, 소멸을 피해 뒷걸음질을 친다. 그렇게 세속 인정의 전투에 몰두한다. 강력한 생명의 리비도를 내뿜으며, 사회가 원하는 방향에 저항도 없이, 하나의 성실한 부품이 되어 일상을 돌린다.
우리의 정신 세계의 눈 먼 장님은 언제쯤이나 이 소외의 노동에 대한 화해의 지혜를 알려줄 것인가? 마트에서 구입할 몇 가지 생존 비품 만큼의 교환 가치를 벌기 위해 생명으로 가득한 20+의 가면을 뒤집어 쓰는 이 어설픈 연극에 대해 어떤 목적이 있다고 또 한번의 지적 사기를 감행할 것인가?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든 마녀 키르케의 마법에서 풀려나기라도 했다. 그는 영웅적 서사를 과거에 살면서 그 의미를 미래에 연결시켰다. 온갖 마녀들의 시험과 유혹에서 빠져나오는 탈출 감행에 성공하여 마침내 이타카의 운명의 마누라, 페넬로페에게 돌아가, 사랑하는 강아지가 자신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나의 육체는? 나의 육체적 삶의 현장은? 여전히 바닷가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우리의 천박한 자본의 무대에 한 역할을 수행하는 마녀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귀를 막지 못한 채, 경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빛깔 엷은 맥주가 가득한 선술집의 취기 같은 단순하고 행복하고 매력적인 것을 구매하고자 욕망하는 육체의 요구에 굴복한다. 노동이건, 소비이건, 공작이건, 정치이건, 혹은 사랑이건 전방위적으로.
기쁨을 느끼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행복한 노래, 감각적 유희, 달콤한 과자, 계산없이 삶을 향해 열린 온갖 디오니소스적 잔치가 우리의 생명이 된지 는 선사보다도 오래 되었다. 악의성과 적대성이 내재한 삶의 무한한 생명력에 언제나 어김없이 시선을 빼앗기는 육체. ‘애벌레가 알을 낳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나뭇잎을 고르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기쁨에 저주를 내리는 사제’의 속셈을 알아차린 육체는 기꺼이 악의 권능에 몸을 내맡긴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 비극이 말했던 것과 다른 것을 의미했던 유배된 영혼을 설파한 그리스 철학과 영원히 멀어졌다. 눈 앞의 적대성에 눈이 멀어 악마적 현실에 절박하게 대면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과거와 동일한 천박한 통속의 무대에 올라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나.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길을 잃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 마냥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 순수한 악의 기쁨을 찾으며, 최영미 말마따나,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에 몸을 싣고,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에 취한다.
자, 그러니 나와 똑같이, 어김없이 어느 작은 선술집에서 향긋한 노란 빛깔의 맥주와 그 취기에 기꺼이 동전을 던지는 가련한 존재들아! 이 악마의 시를 껴안고 오이디푸스적 저주를 노래부르자! 안 그러면 어떻게 너희들의 악마성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멀리서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