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이 사랑한 도시,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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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아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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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척이나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주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끝이 없습니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직접 찍은 세잔의 작품들
남프랑스 미술관투어 5일 째,
세잔의 도시 엑상프로방스에 가는 날이다.
▲마르세유 생 샤를역에서 기차를 타고 엑상프로방스로~
마르세유에 호텔을 잡고 주변 도시 미술관투어를 하고 있었기에
다시 생 샤를
- 마르세유의 교통의 중심,
매우 아름다운 역사를 자랑한다-
역으로 와서
기차를 타고 50여분 만에 엑상프로방스 역에 도착한다.
▲ 엑상 프로방스역(Gare d’aixen Provence)
“이 곳의 햇빛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모든 물체가 마치 실루엣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남프랑스의 미스트랄,
그리고
마치 피부를 뚫을 듯한 강열한
햇살이 내리 쏟고 있었다.
<세잔의 아뜰리에> 까지 걸어서 갈 예정였으나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
출국 전에 미리 신청 해 놓았던
‘우버택시’를 불렀다.
10분여 만에 도착한 우버택시를 타고 <세잔의 아뜰리에>,
그 곳에 도착했다.
“나는 보고 느낀 것을 그립니다.
나는,
강렬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 세잔의 아뜰리에 문 앞 이정표
방문객들이 많아 입장시간 순서대로 대기,
정해진 시간에 일정 인원만
입장하도록 되어있다.
▲입장료(8유로)를 내고 입장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드디어 세잔의 아뜰리에 입장!
“세잔의 풍경화...
당당하면서도 그토록 생생하고, 그토록 유연한,
왜냐구? 거기엔 감각이 있기 때문에!”
- 카미유 피사로(세잔의 스승)
▲ 세잔의 그림속 소품들 아뜰리에 안에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
20명 정도 되는 방문객들은 세잔의 작업실을 서성이며
세잔의 정물화 속에 구상주의 모델이 된 바로
그 사물들(바니타스)의 숨결을 느끼며
세잔을 추억한다.
빛과 색채를 강조했던 세잔의 작업실 답게 통유리로 된 큰 창으로
투명한 송곳유리 같이 날카롭고 강렬한
주홍과 보랏빛 색의 빛들이 쏟아져 내리고,
높은 천장 가득한 실내는
파리 살롱전의 낙선에 대한 실망, 그리고
소시에테(제1차 인상파 전시회)에서의 수많은 비난에
대한 절망,고뇌 외로움 신념 절규 예술적 고립감등을 품은
세잔의 영혼이 서려 있는 듯한, 이 공간!
어디선가 세잔이 붓을 들고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착각에
가슴은 뛰고 머리와 몸이 잠시 몽롱해 진다.
▲ 세잔의 아뜰리에 입구 작업실은 2층이다. 현재 1층은 사무실
“그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다.”
(the father of all of us)
-파블로 피카소
▲세잔의 1875년 자화상
Cezanne, Paul(1839~1906)은 1839년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출생,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아들이 판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랬으나, 세잔은 법학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 미술공부를 하였다.
엑상프로방스 부르봉 중학교에서,
에밀졸라 건축가 밥티스탱 바이유와 함께 삼총사로
우정을 나누었으며 특히 졸라는
세잔이 화가가 되는데 많은 격려와 영향을 미친다.
살롱전에 계속 낙선, 엑스로 돌아 와,
모든 유파로부터 탈피하여 독자적인 조형미학의 새 경지를 개척 한다.
“실내나 스튜디오에서 그린 그림은 결코 야외에서
그린 것보다 좋을 수가 없다.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면
인물과 땅의 대비가 선명해지고 풍경도 멋있어진다.”
-1866년 친구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내용 중
최초의 인상주의자 세잔, 크고 붉은 눈. 회색 수염. 난폭한 인상.
사나운 성품과 달리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랑의 소유자.
세잔은 파리에서 엑상프로방스로 돌아 와
죽을 때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다가 죽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1906년 엑스의 한 시골에서 천둥치고 비,속에서
풍경화 작업에 전념하다 현기증으로
쓰러진다. 67세로 사망.
구상적인 자신의 정서를
추상적인 것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세잔의 목숨을 앗아갔다.
세잔은 오로지 내적 확신만을 길잡이 삼아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많은 장애를 극복했고 그의 작품들은 회화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세잔은 1903년 1월, 그의 첫 개인전을 열어준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에게 고백한다.
“저는 약간의 진경(進境)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까?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사제직 같은 것입니까?”
호기심과 고독을 즐긴 화가.
그가 만든 것은 왕성한 호기심였으며, 누구 보다도 고독했다는 것을...
그 독한 호기심과 고독을 통해,
예술세계의 성주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정물화를 완성하기 위해 100회여를 작업했고,
초상화를 그릴 때는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끝없는 실험정신으로 자연의 진정한 리얼리티를
캔버스 위에 구현하려 평생을 바친
대가의 비전과 철학에
방문후기를 정리하며 겸허하게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엑상프로방스 <세잔의 아뜰리에>에서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