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two + 지우고 싶었던 순간들

 

 

이동길ㅣ50+스토리 공모전 우수상

 


정년퇴직 1

이젠 노을빛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인생소풍이 끝나는 건가? 2014년 12월. 나는 마지막 직장으로 생각하고 일했던 H회사에서 정년 졸업했습니다. 그나마 1년이나 연장되어 좀 더 일하다 나오게 된 것이 어느정도 위안은 되었습니다. 사실은 회사에서 기술직 인원을 구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연장되었던 거지만……. 그래도 나이 50대 중반에 입사한 그 회사에서 정년까지 마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평생 엔지니어로 일해 온 것 에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습니다. 나는 30년 이상 화학플랜트 관련 일을 전문으로 해온 엔지니어입니다. 그런데 노후대책이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직장을 졸업하고나니 당장 먹고 사는 현실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뭐하느라 그간 노후준비도 못해놨는가? 아! 세월이여…….

 


지우고 싶었던 순간들

난 89년도에 화학기계제조 공장을 설립,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지난 후 영업상의 문제로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 회사를 넘기고, 나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시에 소규모투자를 하고 무역 등 해외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직원의 사고로 3년 만에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래도 수출 좀 했다고 무역의 날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도 받아봤습니다(물론 의례적인 일이였겠지만).
그 후 난 다시 근무하던 회사로 복귀 하였지만 얼마안가 외환 위기가 닥쳐 우리 회사는 부도가 났습니다. 사실은 외환위기 때문이 아니라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자업자득이였으며 그 시점이 우연히 IMF 시기와 맞은 것뿐입니다.


뇌물이 투자라는 영업철학이 뿌리내릴 그때, 난 회사의 빤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영업 능력이 없었던 난 낙동강 오리알은 되기 싫어 이 보도 못한 영업철학을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과 러시아와의 수교로 관련 사업 메리트가 부각될 시절, 난 가깝게 지내던 중소기업인들과 같이 극동 러시아를 두루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난 독립적으로 살아갈 기회를 찾을 것 같아, 새롭고 막막한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진짜 이유는 하루 빨리 괴이한 철학에서 빠져 나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사라진 90년대의 갑질

우리 회사는 대기업인 D사의 하청업체였는데, 당시 D사는 곳곳에 부패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회사의 갑질에 타협하여 수입보다 더 많은 접대비를 지출했으며, 그 악순환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종결되었습니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직원들의 기술과 땀으로 시공 납품한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우리 회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같은 갑들의 상습적인 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오히려 추가로 감사했습니다. 우리 회사의 이런 비굴한 투자로 인해 갑질 단위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습니다.


어떤 때에는 갑측에서 대금결제를 조건으로 얼마를 선입금 하라고 했습니다. 자금이 어렵다고 하니 약속어음이라도 좋다고 했습니다. 결국 불법 유통어음을 발행하여 건네주고 대금결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부조리가 아닌 선투자이며, 미래를 보장한다는 갑의 미끼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난 이 서글픈 악행의 주관자는 아니었더라도 최소한 공모자 내지는 하수인 이었습니다. 아니 난 오히려 회사가 가망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괜히 나서서 링거를 꽂아놓고 부도 날짜가 연장되도록 잘난 체한 것입니다. 하수인 주제에….

 


정년퇴직 1 (계속)

난 파탄직후 택시기사로 일을 해보았지만 처음엔 사납금 채우기도 힘들었습니다. 거기다 부도난 회사의 보증채무로 인해 급여까지 압류당해 도급제(일당제)로 일했습니다. 결국 3년 만에 택시를 그만두고, 최저 생활비 수준의 급여 조건으로 토목설계하는 회사에 들어가 기술직으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몇 년 근무하다보니 나의 전공과는 다소 동떨어진 토목설계를 하는게 맞지 않았습니다. 정년까지 얼마 안남은 시간에 마지막으로 전공을 찾아 일하고 싶었습니다.


이에 2007년 초 화학플랜트 시공회사인 H사에서 관련 엔지니어를 채용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난 50대 중반의 나이에 응모했습니다. 그 회사 사장님은 플랜트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꽤 권위가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긴장을 하고 면접에 임했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전공 과목 시험이 치러졌습니다. 열역학과 구조역학 중에서 몇 가지를 묻기에 그 자리에서 계산해서 풀었더니 틀렸다고 했습니다. 에라, 떨어질 셈 치자 까짓것… 
난 옛날 산업기술센터에서 기술강의를 했던 것을 기억하며 침을 튀기며 떠들어 댔습니다. 한참 갑론을박 끝에 사장님은 사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아! 집에 가라고 교통비 주는구나. 난 체념하며 봉투를 열었는데, 이게 웬일? 거기엔 백만 원짜리 수표가 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있잖아요, 이걸로 맛있는거 사드시고 옷도 하나 사입으시죠. 나를 이긴 사람은 선생이 처음입니다. 우리 회사 플랜트 사업부장 하시죠?”

 

난 속으로 좀 으쓱했지만 순간 비쩍 마르고 남루한 내 행색에 창피함도 느꼈습니다. 내가 싸구려 옷 입은줄 어떻게 알았을까?
난 마지막이라 생각한 이 직장에서 전공분야를 되찾아 일하게 된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현장소장으로 근무하다가 2014 년도 말 첫 정년퇴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년퇴직 2

서두에 서술한대로 난 정년퇴직 즈음해서 여러 걱정이 많았습니다. 만일 직장생활을 안한다면 오직 국민연금 40만원으로 생활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정년이 지나서 재취업을 한다는건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된 현실에서 결코 쉽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대부분 중소기업 경력직원 채용시에는 부담 없는 임금으로 해당 업무를 능히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을 우선 채용할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나도 한 때 오너였을 때 그랬으니까요.
그리 마음먹고 캐드 설계만으로는 재취업이 어려울 것 같아 취업 조건에 조금이라도 유리하도록 전문기술직에게 요구되는 3D설계를 추가로 습득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개서상에 내가 전공한 분야에 대하여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상세히 적고, 희망연봉은 정년이 지났음으로 평균임금 의 절반정도만 표기했습니다.


이렇게 작성한 이력서를 잡코리아 등에 올려놓고 일자리 정보를 통하여 구직에 힘썼습니다. 또한 고용센터 등을 방문하며 일자리를 찾아다녔으며, 특히 온라인 잡 사이트에서 유익한 정보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단기간의 주차관리 알바도 해봤는데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2015년 2월초 충남 추부 논공단지에 있는 C사에서 면접요청이 왔습니다. 그 회사에서는 수주 받은 화학 프로젝트를 시행해야 하는데 엔지니어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 했습니다. 회사가 제시한 공정도면을 보고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기계장치, 화학플랜트, 토목 등의 설계직원이 필요하다면 각 직 종별로 1명씩 최소한 3명을 채용해야 될 것입니다.”
내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근데 저는요. 화학플랜트에 관해서는 엔지니어링이나 현장 실무를 거의 다 해봤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3명 필요 없이 혼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또 시공관리나 기술행정 같은 부수적인 업무도 가능하고요. 주6-7일 근무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한 나에게 회사에서는 몇 가지 확인을 한 후 우선 1년 계약직으로 채용해 주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희망연봉보다 60%를 더 준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입사 후 거의 매일 야근을 하며 1인 3역을 실천하였습니다. 1역만 하면 쪽팔리니까요. 회사에서는 정상퇴근을 권했지만 일에 집중 하다보면 12시가 되곤 했습니다. 처음 2-3개월 동안은 주로 혼자서 야근을 하였지만, 지금은 일하는 회사 분위기로 바뀌어 다른 직원들도 바쁠 땐 시간을 초월하며 같이 근무함으로써 거래처에 납기가 지연되는 악순환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입사한지 1년이 지나고 부터 회사에서는 제일 중요한 프로젝트의 설계와 시공업무를 내가 맡아 진행하도록 하였으며, 지금은 계약직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경영상의 부담이 될 때에는 난 감사하는 퇴진을 할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마지막 줄을 읊조리 면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돌아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정년후의 재취업 추천 전략

최근 기업체의 기술직 직원들은 옛날과는 달리 한 직종에 국한해서 일을 하는 편이며 같은 분야에서도 다른 직종은 잘 몰라서 업무를 처리하기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물론 이것은 취업하기가 어려운 시기에 일자리를 같이 나누어 갖는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그것은 매출대비 인건비의 비율이 적은 대기업에나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떻든 이러한 세태의 변화로 인하여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들 조차도 일인다역을 하는게 아니라 직종별로 분업화하고 있는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정년 퇴직자들이 재취업을 진정 원한다면, 오랜 세월 다져온 자기 전공분야에서의 경험을 노하우로 승화시켜, 일인다역과 시간을 초월하여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적극 표현한다면 보다 쉽고 빠르게 취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변해야 할 기술부문의 인식

한 세대의 끝자락 기술인으로서 한 가지 바람을 추가코자 합니다. 우리사회에서는 학벌 및 학위에 대한 권위가 실제적인 실력보다 우선시 되어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행으로 그간 적지 않은 기업체에서 실무기술은 맨 뒤로 처지고 그 대신 고질적인 권위의식과 탁상이론으로 비정상적인 제품이나 시설물 등이 만들어지고, 또한 엄청난 비용낭비가 발생한 사실을 기술 분야의 40년 체험을 통해 많이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도 현재에도 국내에는 실력있는 기술인, 기능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며,

 

이제 우리사회도 권위나 형식보다는 선진 외국처럼 능률과 실력이 우선하는 분위기로 바뀌길 기대합니다. 그 일환으로 실력 있는 장년들의 기술과 경험을 널리 활용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2016. 11. 22.


장년 일자리를 위한 여러 가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50+의 문화, 사회참여활동 등 다양한 활동사례를 발굴하고 50+세대의 활동이야기를 알리고자 ‘2016년 50+스토리 공모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순차적으로 수상작 50+스토리를 선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