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이 있다. 원래 <할아버지의 부엌>이란 제목으로 1990년에 출판되었던 책인데 그 때 부제는‘팔순 할아버지의 홀로서기. 2008년 <아버지의 부엌>으로 개정 출판되면서 부제도 ‘노년의 아버지 홀로서기 투쟁기’로 바뀌었다. 아내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83세의 할아버지(아버지)가 주인공. 딸도 있고 아들도 있지만 저마다 홀로된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주인공 노인은 이제부터 홀로 삼시세끼를 해결하며 살림살이를 꾸려가야 한다.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수많은 ‘집안일’은 오롯이 그의 손발을 움직여야 돌아간다. 청소, 빨래, 밥 해 먹기, 모두 그의 책임이다. 평생 그의 공간이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는 부엌도 그의 자리다. 이 사람, 어떻게 될까? 아버지는 그토록 뒤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교관처럼 가르치고 다그치는 셋째 딸과 이웃의 도움과 구박(?!)을 받으면서 홀로 서기에 성공한다. 그동안 까마득히 몰랐던 ‘살림살이’의 모든 것을 배워나간다. 무관심했던 가족들의 감정과 계절의 변화까지 세밀하고 민감하게 감지해내는 능력을 얻은 것은 덤이다. 그야말로 아버지는 고독한 늙은이, 즉 ‘독거노인’이 아닌 온전히 자립한 ‘어른 남자’가 된다.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 수상작품 <아버지의 부엌>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83세의 늙은 아버지.
혼자 남게 되자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선언한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유명한 남성 셰프들이 속속 눈 앞에 나타났다. 전국민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마스터셰프코리아MasterChefKorea나 본격 요리채널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했던 요리들을 척척 만들어냈다. 연예계 스타들도 질세라 파티음식을 선보였다. 먹방, 쿡방, 요리서바이벌, 음식기행, 미식 프로그램 등의 찬란한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요리사는 셰프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상향등급조정이 되어‘소년’들에게조차 선망의 직업이 되었다. 요리 잘하는 남자가 가장 섹시하다는 ‘요섹남’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보통 부엌의 주인은 아내, 엄마, 딸들이었고 요리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의 음식조리, 식사준비는 그저 마땅히 여자들의 일로 여겨졌었다. 시나브로 아니 돌연히 남성 요리사가 연예인 또는 엔터테이너 급으로 자리 잡으면서 부엌은 소수의 특별한 공간이 되었고 요리는 비범하고 환상적인 이벤트가 되었다. 부엌과 요리의 세계가 양분되며 요동치기 시작한 그 때, 유인경 작가가 썼다. “그러니 환상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요리프로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혼, 사별로 인한 중년 독신남들, 백수 아저씨들 그리고 할아버지들을 위한 ‘생계형 요리’도 중요하죠. 그러니 이젠 스타 셰프나 연예인들이 만드는 화려한 파스타, 샐러드도 좋지만 미역국 끓이기, 기본 양념장 만들기 등 일상의 식단들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좀 만들어주시면 안될까요. 고령화가 먼저 시작된 일본에서 팔순이 넘어 상처한 할아버지가 밥 짓기와 된장국 끓이기를 배우는 <아버지의 부엌>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처럼 우리도 곧 할아버지의 요리솜씨가 생존무기인 세상을 살아야 할 테니까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돋보이는 글이다. 희고 높은 요리사 모자와 흰 가운을 입은 일류 남성요리사도, 그 모습을 동경하는 평범한 소년들도, 일하는 아내와 같이 사는 남자도, 은퇴한 직장인 남성도, 어느덧 시니어 어르신이 된 50플러스 세대 남성도 기꺼이 또는 떠밀리더라도 ‘내 집의 부엌’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으니.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삼시세끼‘집밥’ 만들기, 값비싼 외식 한 턱 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일상의 밥상 차리기는 남자에게도 점점 자연스럽고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남자의 밥상이 세상을 바꾼다

은퇴했거나 직장인이거나 또는 백수라 해도 소위 집에서 한 끼 먹는 남편은 일식님, 두 끼 먹는 남편은 이식이, 하루 세 끼 먹는 남편은 삼식이 새끼라는 소리가 무시로 떠도는 세상이다. 한 끼도 안 드시면 영식씨, 야식까지 드시면 죽일 놈의 새끼라고 한다는 소리는 유머라기엔 좀 간담이 서늘한 지경이다. 차리는 사람이 여자, 먹는 사람이 남자일 경우에만 쓰이는 웃지 못할 말이다. 먹고사는 일, 음식에 관한 이야기 거리는 하루가 머다 않고 차고 넘치게 생겨난다. 먹방, 쿡방, 요섹남은 새로울 것도 없을 단어가 되었고 집밥에서 이제 혼밥, 혼술까지 나아갔다. 바싹 마른 소녀아이돌이 산낙지를, 추어탕을 입이 터져라 보란 듯이 먹어대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먹는’ 장면이 최고로 중요해져 수없이 되풀이 재생된다. SNS 세상에서는 조금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의 특별한 외식을 자랑하던 때를 지나 지금은 각자 집에서 만든 요리를 포스팅 하는 것이 대세다. 플레이팅 솜씨마저 특급호텔 뺨칠 수준이고 요리 종류도 술 빚기, 장 담그기까지 전문가가 무색할 정도라 혀를 내두를 만하다. 요리책도 그렇다. 전문가가 만든, 감히 시도조차 못할 요리를 빠닥빠닥한 종이에 두껍고 화려한 장정으로 펴내던 시절을 지나 일품요리, 일상요리를 팬시하고 다정하게 알려주는 책들이 많아졌다. 뿐인가.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은 <사위에게 주는 요리책>으로, <엄마가 딸에게 주는 요리책>은 <아들에게 주는 요리책>으로 대상이 달라졌다. 부엌의 주인이 여자에서 남자로, 요리라는 것이 누구라도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상의 일로 이동 중인 것이다. 이 이동의 움직임 중에서 단연코 돋보이는데다 재미있기 그지없는 두 권의 책이 있다.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와 <소년이여, 요리하라>가 바로 그것.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 부제가 ‘삶이 따뜻해지는 다섯 남자의 밥상 이야기’
밥상 차리는 남자를 쓴 다섯 명의 필자들, 각자 요리를 만들어 와서 연 포트럭 파티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는 평범한 남자 5명이 쓴 요리 이야기책이다. 세상에, 책을 여는 글이 ‘남자의 밥상이 세상을 바꾼다’다. 사실 그들 스스로 평범하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다섯 명 모두 요리입문 과정이 상당히 비범하고 훌륭해서 감동까지 받게 된다. 이 남자들은 요리의 과정이나 완성요리를 자랑스레 내놓기보다 부엌에 들어가게 된, 아니 밥상을 차리게 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다섯 남자 공히 부엌을 접수하게 된 까닭은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는데, 그 사연이 하도 아름답고 진정이 담겨있어서 저런 남자랑 같이 사는 여자, 저런 남자를 아버지로 둔 자식이 부러워질 정도가 된다. 그들이 해준 요리가 먹고 싶어 침이 흐르는 게 아니라 부러워서 침이 고인다. 이 사람들은 책을 만들기 위해 요리를 한 것도 밥상을 차린 것도 아니다. 이 남자들은 모두 꽤 오랫동안 페이스북에 거의 매일 자신이 차린 집밥, 밥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들의 상차림은 어디 먼 곳의 낯선 이국의 나라에서 먹은 호텔 요리나 별 세네 개짜리 식당의 셰프 요리가 아니었다. 외국 여행지나 유명 식당의 요리는 찾기 어려웠고 파워 블러거의 음식점 소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가지찜, 된장찌개, 닭발 조림, 감자튀김 같은 것들, 제 철에 나는 재료들을 손수 요리한 것들이 계절의 변화와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버무려져 올라왔다. 알리오 올리오, 치즈샐러드, 크림치즈스파게티 같은 것도 손수 만들 때만 올렸다. 사람들은 그들의 페이스북 일상요리밥상에서 그 날 저녁 해먹을 반찬의 레시피를 얻기도 하고 계절에 맞는 반찬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휴대폰으로 찍은 음식사진들은 선심쓰기용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진짜 밥상이었다. 다섯 명 모두 잠깐 부엌에 들어가 특별식 하나 만들어놓고 뒷정리는 나몰라라는 하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었다. 음식재료구입부터 요리하기, 설거지 뒷정리까지 책임진,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밥상, 사람을 살리는 밥상을 차려내 아내와 아이와 저 자신을 먹이는 이야기들이었다. 변호사 유정훈, 출판인 강성민, 번역가 황석희의 상 차리는 이야기도 마음을 울리지만 스스로 붥댁(부엌데기)이라 이름붙인 조영학과 은규를 위한 소박한 밥상(은소밥)을 차리다가 현재 요리선생이 된 이충노의 이야기는 짜르르 심금을 울린다.

 

조영학의 이야기 제목은 아내에게 바치는 밥상이다. 오로지 아내를 위한, 아내에 의한, 아내의 남자로 삼시세끼를 만들어낸다. 부엌을 책임져서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애초의 초발심이다. ‘상남자’가 밥상 차리는 남자라는 것도 이 사람이 농 삼아 한 말에서 시작되었다. 힘세고 박력 터지고 근육 빵빵한 남자가 상남자라고? 아니,아니, 밥상을 차리는 우리가 상남자야. 되고파 너의 오빠, 꽉 잡아 날 덮치기 전에, 내 맘이 널 놓치기 전에! 소리치는 방탄소년단 노래 속 남자가 상남자라고? 아니 아니, 머리카락이 희끗해도 뱃살이 조금 나왔어도 기꺼이 앞치마 두르고 손에 물 적시는 우리가 상남자야. 그는 부엌으로 들어감으로써, 밥상을 차림으로써 행복으로 가는 계단을 디디기 시작했다고 기쁘게 고백한다.

 

 

집밥은 그저 밥 한그릇이 아니다

‘소통의 밥상으로 다시 찾은 아들’이란 제목으로 요리 이야기를 쓴 상남자 이충노는 현재 남자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충노의 요리교실은 배우는 이나 가르치는 이나 모두 머리칼 희끗한 중년의 남자들이고 애초부터 요리사가 직업은 아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충노는 삼시 세끼 모두 오로지 아들을 위해 차리기 시작했다. 아들 은규가 중학생이던 시절, 이런저런 문제로 서울에서 양평으로 전학을 했고, 돌볼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아빠인 이충노씨가 일을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생면부지의 땅으로 살러가면서 요리를 시작했다. 오로지 두 사람, 아들과 아빠. 집을 얻고 시장을 가서 생전 처음 밥상을 펼치고 접는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엄마이자 아내가 하던 일을 오롯이 이어받아 아들 은규를 위한 밥상을 매끼 차려내면서 이충노는 아들과 밥상을 사이에 둔 소통을 시작한다. 그렇게 사년, 오년. 나물 이름도 모르고 야채 썰기도 서투르던 그는 어느 덧 된장, 간장도 담그는 사람이 되었다. 실력은 갈수록 늘어 아무 말 없이 서툰 아버지의 밥상을 받아먹던 아들은 현재, 마음도 몸도 건강한 대학생이 되었다. 그 몇 년 동안 ‘아빠, 집밥이 제일 맛있어요.’라던 아들의 말을 가장 기쁘게 품었다는 이충노의 밥상이야기는 밥을 차려 누군가를 먹인다는 것이 일종의 수행처럼 보일 정도로 경건해 보인다. 그가 차린 밥상의 이름이 ‘은소밥(은규를 위한 소박한 밥상)’이었다. 그 소년이었던 은규. 바쁜 아빠 엄마와 잘 소통하지 못하고 잠시 궤도를 일탈해서 아빠의 직업을 전업주부로 바뀌게 만들었던 은규, 부엌이라곤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은규 또래의 소년들을 향해 다정한 손짓을 시작한 책도 새로 나왔다. <소년이여, 요리하라!>가 바로 그것.

 

 

  

<소년이여, 요리하라!> 부제는 ‘자립지수 만렙을 위한 소년 맞춤 레시피’

 

 

 

 소년이 자라 남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밥상을 차리는 남자가 된다.

<소년이여, 요리하라!>는 엄마가 있어서, 할머니와 누나가 있어서. 아무튼 집안에 ‘여자’가 있어서 제 손으로 밥을 해먹을 줄도 차려먹을 줄도 모르고 어른 남자가 되어버린 11명의 남자가 어릴 때의 자신에게, 지금 그 나이인 또래의 소년에게 들려주는 요리이야기 책이다.

 

요즘도 소년들은 거의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꿈 중에 상위 랭크된 직업이 요리사다. 방송에 나오는, 일류 식당의 요리사가 돈도 잘 벌고 연예인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 때문일 것이다. 막연히 화려한 요리사의 꿈을 꾸는 소년들에게 지금은 청년이 된 믿음직한 어른남자 열한 명은 진짜 다정하게 형처럼, 삼촌처럼 자기 밥을 차려먹을 줄 아는 남자만이 온전한 독립과 자립을 한 남자, 진짜 상남자라고 일러준다.

 

단 한 가지라도 요리를 배울 것, 그 다음 요리세계의 저변을 넓히면 된다고 어깨를 토닥여준다. 연애를 할 때 파트너를 위해서, 바쁜 엄마를 위해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신 밥상을 차린 여형제들을 위해서, 나아가 여자가 없으면 라면이나 먹든가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편의점, 패스트푸드를 먹을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 자립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해준다. 김치볶음밥, 라면 볶음, 미역국, 계란밥, 김밥, 까르보나라...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와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한 사람의 어른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능력’이라며 간단 일품요리법을 손에 쥐어주는 어른남자 열한 명은 그 음식을 요리해 먹으면서 같이 보면 좋을 영화, 노래, 만화책을 추천해주는데 읽는 재미도 쏠쏠한 코너다. 소년이 아닌데도 이미 다 아는 요리법인데도 재미있고 신기해서 막 따라해 보고 싶게 만드는 요리책이다. 단언컨대, <상 차리는 남자>와 <소년이여, 요리하라!>를 읽는 열흘 여 동안 종종 책장을 덮고 부엌으로 달려가 요리를 했다. 뜨거운 가스불 앞에서 요리를 하는 일이 행복했다. 위의 세 권의 책들은 모두 삐까번쩍한 요리책이 아니다. 사진도 거의 없고 있어도 흑백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요리가 담담하게 이야기와 함께 전달될 뿐인데도 창의성이 샘솟는 이상한 책이다.

 

아들은 소년에서 남자로, 남자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할아버지가 된다. 책 이야기는 역순으로 내려왔지만 거꾸로 올라가보면 어릴 때부터 어떻게 밥상을 대해야 할지 깨닫게 만든다. 소년일 때부터 자연스럽게 밥상을 차리다보면 나중에 80세가 넘어 홀로 어렵게 부엌에 서지 않아도 된다는 바로 그것. 이러니저러니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 동안 맛있는 음식을 손수 차려 사랑하는 이와 나 자신을 먹이는 그 좋은 일을 너무 오래, 여자들이 독차지해 왔다. 너무 책임져왔다. 그러니 이제 남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우리도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겠다는 다짐, 같이 누려보자는 권유가 이 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제다.

 

마침맞게도 뉴스가 떴다. MBC 새 주말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극본 박현주, 연출 주성우)가 오는 9월 2일(토)로 첫 방송을 시작한단다. '밥상 차리는 남자'는 아내의 갑작스런 졸혼 선언으로 가정 붕괴 위기에 처한 중년 남성의 행복한 가족 되찾기 프로젝트를 그린 드라마라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지금까지 쓴 이야기와 너무 딱 맞아서 깜짝 놀랐다. 책을 읽고 난 후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를 본다면 금상첨화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