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읽기
‘다가오는 것들 Things To Come’ #1
고대 인도인들은 인생을 4단계로 생각하였다. 첫째는 학습기(學習期)이다. 태어나서 25세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는 스승으로부터 삶의 지경험과 지혜를 전수받는 기간이었다. 둘째는 가주기(家住期)이다. 대략 50세까지의 기간이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는 기간이다. 생명을 준 신들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자신을 키워준 부모와 조상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자식을 낳아 기른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부모와 조상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겼다. 그 다음에는 지식과 학문을 가르쳐 준 스승과 성자들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진리가 담겨 있는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셋째는 임서기(林棲期)이다. 숲 속에 머무르는 기간으로서 대략 75세까지의 기간이었다. 50세가 넘으면 가정과 사회로부터 벗어나서 한적한 숲 속으로 들어가는 시기였다. 그동안까지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였으므로 이제부터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는 단계이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는 연습을 하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한다. 넷째는 유랑기(流浪期)이다. 삶의 마지막 단계이다. 세속적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시기이다. 말하자면 얻어먹으면서 떠돌아다니는 거지로 사는 삶이다. 이때는 살아있으면서도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므로, 길에서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인생 4단계론’이다. 오래 전 2005년, 조용헌이 조용헌 살롱(167)에 쓴 글인데 이 글을 읽을 때야말로 바야흐로 임서기林棲期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임: 숲 서: 살다, 거처를 정하여 살다 기: 기간. 문자 그대로 한 사람이 살다가 50세가 될 즈음이면 숲에 깃들어 혼자 살 때라는 말이다.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였으므로 이제부터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는 단계’라는 것이 마음을 울린다. 대략 75세까지. 글에 나온 대로 75세 이후의 유랑기를 먼 후일이니 제외하더라도 50세 이후부터 살아야 할 25년의 기간은 현재 장년을 맞이한, 장년을 살고 있는 50플러스 세대에겐 새로운 버전의 사춘기처럼 불안한 시간이다. 옛날처럼 평균수명이 50세 전후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기간이겠지만 지금은 어쨌든 평균수명 백세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오래 살게 되어 좋아할 수도, 누군가에겐 지나온 50년보다 더 깜깜할 수도 있는 50세 이후 이어질 삶, 남은 반세기 50년은 무엇이 우리 앞으로 착착 다가올까. 중장년을 맞이하는 전 세계 60억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다르면서도 어쩌면 같게 다가올 삶의 일들을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보는 것으로 미리 생각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예요
<다가오는 것들> 한국판 포스터에는 기차에서 내린 여주인공과 젊은 남성이 정답게 인사하는 모습에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예요’라는 헤드 카피가 쓰여 있다. 얼핏 보면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제목과 딱 맞게 조응하는 것처럼 아, 저 여자에게 저 남자와의 새로운 로맨스가 다가오는 건가싶은 느낌이 든다. 프랑스판 포스터에는 그저 원제목 L’avenir 즉 ‘미래’라는 프랑스어만 크게 썼을 뿐이고 두 사람의 거리는 적당하게 떨어져 있다. 철학교사인 나이든 여주인공과 철학제자인 젊은 남주인공이 나란히 포스터에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인데 이미지부터 약간 다른 정보를 들이미는 느낌이다. 한국관객이 서정적인 풍경을 좋아하는 까닭일 것이다.
여주인공의 독백이나 다짐 같은 헤드 카피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예요’ 중에서 ‘지금껏 잘 살아왔고’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오프닝 장면에서의 나탈리(이사벨 위페르)는 아직 젊다. 미래에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큰 관심도 걱정도 없다. 딸 하나, 아들 하나는 아직 어려서 엄마 아빠의 여행에 그저 동행했을 뿐이다. 철학교사인 나탈리는 여행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배안에서 학생들이 써낸 리포트를 살펴보고 있다. 리포트의 주제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빼곡하게 써낸 학생의 페이퍼에 AA를 체크하고 나탈리는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로 나간다.
나탈리가 읽는 묘비에는 ‘위대한 프랑스 작가 여기 잠들다. 파도와 바람소리만을 듣고자 했던 그의 마지막 소망을 존중해주길’이라고 쓰여 있다. 파도와 바람만을 앞에 둔 무덤 위로 둥두렷하게 ‘미래’라는 글씨, 우리 제목으로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제목이 떠오른다.
오프닝 시퀀스, 즉 제목이 떠오르기 전, 짧은 이 장면 안에 이미 영화 주인공의 ‘지금껏 잘 살아왔고’의 세월의 내용이 다 들어있다. 나탈리는 철학교사로서 자기 일에 자긍심이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가르치면서 최선을 다해 리포트를 읽는다. 아이 둘은 구김살 없이 종알종알 이야기하며 자기들 관심사를 좇는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를 같이 나눈다. ‘지금까지’을 잘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장면 안에 나탈리가 맺고 있는 인물관계도의 심리적 거리도 다 볼 수 있다. 먼저 나가서 서 있거나, 음악 이야기(25년 동안 슈만과 브람스만 들었다)만 하거나 공연히 혼자 남아 먼 바다를 바라보며 딴 생각에 잠긴 남편과 나탈리의 거리, 아직 묘비나 무덤, 죽음 같은 것에는 관심 없는 천진한 아이들과 엄마인 동시에 늙어가는 엄마를 둔 나탈리의 거리.
여기까지가 지금이고, 이제 저기 무덤 뒤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확확 자라 독립할 것이고 남편은 딴 생각을 하면서 떠날 것이고 현재 무소식인 희소식인 엄마에게선 슬픈 연락이 올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몰두하는 철학적인 명제도 진리도 세월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제 지금껏 잘 살아왔던 그녀의 남은 날들이 조금씩 변화해갈 것이다. 같은 듯 그러나 청천벽력처럼 다가오는 미래의 달라진 모습은 Des anne’es Plus Tard, 즉 몇 년 후라는 세월의 정보만 턱 던져주고 나름 격한 움직임으로 달라져간다. 다가오는 것들, 세월이 흘러 그녀 나이 50세 안팎. 인생의 다른 단계를 맞이했다.
인생엔 철학 말고도 다룰 게 많으니까
몇 년 후, 라고 나왔으나 아마도 십몇 년은 더 흐른 것 같은 어느 날 새벽, 다가오는 것이 하나 있다. 병든 엄마로부터의 전화다. 불안증을 앓는데다 감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늙은 엄마가 무시로 하는 전화는 이미 오래전인 듯 나탈리는 놀라지 않는다. 남편 하인츠의 태도는 이미 냉담하고 거칠어진 지 오래. 심지어 귀찮아하면서 “당신 엄마 전화야. 받지 마.” 라며 돌아눕는다. 하나밖에 없는 딸 나탈리에게 늙고 병든 엄마는 이미 자식보다도 독립적이지 못한 존재가 된 지 오래다. 아이 둘은 벌써 독립했으므로 집엔 부부밖에 없다. 징징거리며 고독을 호소하면서 요양원에는 절대 가기 싫다는 엄마는 끝없이 퇴행으로 직진한다. 외로우니까 툭하면 119를 부르고 나이에 맞지 않게 사치를 부리고 관심이 그리워 “너희 집에서 같이 살면 안 돼?”냐고 딸에게 매달린다. 나탈리는 아기가 되어버린 엄마에게 딱히 무심하지도 냉혹하지도 않다. 그저 생로병사의 당연한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로 보면서 살필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한, 보살필 뿐이다. 엄마가 키우는 아니 엄마와 같이 사는 늙고 뚱뚱하고 검은 고양이 판도라만큼도 자립적이지 못한 엄마의 늙음과 코앞에 다가온 죽음의 냄새를 짐짓 외면할 때도 있다. 슬금슬금 다가온 또 하나의 일은, 남편의 외도. 큰 딸이 먼저 알아차리고 아빠의 선택을 요구한다. 외도를 끊을 것인가, 엄마에게 충실할 것인가 선택을 하라는 요구 앞에 남편 하인츠는 조용히 다른 여자와 살기로 결정한다. 그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나탈리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통보하는데 나탈리는 충격과 배신으로 쓰러지거나 소리 지르지 않는 대신 이렇게 응수한다. “나탈리. 나 다른 사람이 생겼어.” “그걸 왜 나한테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 “나 그 사람이랑 살 거야.” “그래? 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 무방비상태에서 벼락처럼 다가온 남편과의 이별은 그렇게 일단락된다. 그저 단어로 일단락일 뿐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결말이기도 하다. 나탈리는 남편이 젊은 요가선생과 살겠다고 집을 나간 후,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 완벽하고 철저하게 남편과 이별한다. 질척이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4,50대의 사람들이 맞이해야 할 것들이 부모의 죽음과 나 자신의 나이듦, 배우자와의 심리적 물리적 변화와 이별, 자식들의 독립과 남은 빈 둥지의 삶이라면, 나탈리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미래를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녀는 호들갑과 엄살을 떨지 않지만, 균열의 기미를 포착한 후엔 상황을 파악하고 단호하게 대처하고 정리한다.
세 번째 다가오는 ‘미래’의 일은 그녀의 직업이기도 하고,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철학과 사상의 변화다. 철학을 가르치는 일은 직업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삶 자체가 철학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별거와 이혼과 엄마의 요양원 행을 겪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학생들과 토론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철학교사로서의 그녀의 자세는 단 하나로 수렴된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는 바로 그것.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일 아이들에게 예의 ‘남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진리는 논쟁 가능한가? 진리 확립이 가능한 분야는 무엇일까? 같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고 토론한다.
“루소의 다음 문장을 생각해 보자. 신들의 국가가 있다면 그들은 민주적으로 통치될 것이다. 이토록 완벽한 정부는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잘 생각해야 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집필했고 프랑스 인권선언은 거기서 영감을 받았으니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철학교사로서의 삶 자체가 이미 나탈리의 삶이다. 그녀가 밀려오고 떠나가는 일상들을 담담하게 마주보면서 그때그때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그 자세에 나온다. 철학이란 것이 인간이나 세계에 대한 지혜와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고 자기 자신의 경험 등에서 얻어진 기본적인 생각이라 하면 나탈리는 내면과 경험, 두 가지를 통합하면서 제 앞의 삶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가오는 철학의 세계는 나탈 리가 애정하는 철학을 고루한 것으로 밀어내고 스스로 발전해나간다. ‘지금껏 잘 살아왔던’ 나탈리의 철학의 세계는 지나간 시대의 진리여서, 새롭지 않고 고루해서,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조용히 외면된다. 개정판을 내면 더 잘 팔리고 더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나탈리의 철학총서 계획은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젊은 철학적 애제자 파비엥은 다른 길로 걸어간다. 나탈리는 짐짓 말한다. ‘맞아. 세상에는 철학 말고도 다룰 것이 많으니까.’ 일종의 체념이다.
사회적인 일을 마치고 홀로 숲으로 들어가 자신을 구원하는 기간, 임서기는 50대의 나탈리보다 30대의 파비엥이 먼저 실천하는 것 같다. 시대는 변한 것이다.
영화읽기 '다가오는 것들 Things To Come' #2로 계속
글 권혁란 50+기자 l 사진 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