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나의 은인’이라는 말씀을 새겨본다

 

 

어느 해 여름 아내와 나는 여름휴가를 맞아 차를 타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냥 그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철 스님의 생가도 둘러보았다. 꾸밈이 없는 고택에는 스님께서 생전에 남긴 글 등 중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스치듯 보고 지나치는데 유독 한 문장이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못된 짓을 한 악인은 나의 은인이다.” 말도 안 되는 내용처럼 느껴졌다. 잘못 봤나 싶어 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읽었다. 당시 필자는 직장 동료인 친구의 배신에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었다. 친구와 필자는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동기였고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가정 사정으로 동기들보다 5~6년 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필자보다 나이는 두 살 아래였지만 직위로는 한 직급 위였다. 필자와 달리 온화한 성격의 그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깔끔하게 얻어내고 해결하는 처세술이 있었다. 필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친구가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두 사람만의 은어를 만들어 큰 소리로 허심탄회하게 상사와 동료들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다.

그런데 그와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당시 필자의 총괄 중역이었던 전무님이 부서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그 친구가 자리가 없어 진급이 어려운데 필자가 있는 부서 담당 중역으로 오게 하면 진급이 가능하다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러나 필자는 친구가 잘되면 서로 윈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동의를 했고 그는 곧 진급을 해서 우리 부서 담당 중역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부서 상사로 오는 순간부터 그의 말과 행동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필자의 업적과 실적을 비방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지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참고 지낼 수 있었다. 필자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필자의 총괄 중역이었던 분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본부장과 서로 입을 맞추고 20년간 한 우물을 파온, 어쩌면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보유한 필자를 부서장직에서 해임한 일이었다. 필자를 해임하고 해당 업무를 전혀 모르는, 본부장의 지인을 데려다가 부서장 자리에 보임한 사건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더니 빈말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내와 무작정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난 것이었다.

 

성철 스님이 남긴 말처럼 필자는 그 친구로 인해 세상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한 수 배우게 된 것이니 그가 바로 나의 은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 헤아려봤다. 그에게는 본부장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그가 세상일을 깨우치게 해준 은인이었다.

 

그 후 그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은인으로 대해주니 그도 말없이 많을 것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요즘은 가끔씩 통화도 한다. 물론 예전 같은 친밀함은 없지만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준 은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를 문경지우로 함께할 수 없는 것은 필자의 한계일까?

 

 

 

신용재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