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학 기행 일곱 번째 이야기

-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

 


지난 추석 연휴 중인 9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 광화문역 2번 출구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문학기행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서울시와 사)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주최하는 서울 문학 기행은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 속 서울을 탐방하는 것으로 지난 6월부터 11월까지 총 16회기로 기획되었다.
회기별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문학전문 해설가와 함께 약 3시간 정도의 도보 여행 코스다.

문학유적지 및 문학관, 작가의 집터, 문인들의 시비 등을 탐방하는 코스로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에게도 참여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평일 수요일뿐만 아니라 토요일에도 진행되며 지난 8월에는 야간 기행도 운영했었다고 한다. 

  


서울 문학 기행 일곱 번째 이야기, 박인환 시인

 

서울 문학 기행 일곱 번째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 편에 참여했다.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자료집과 이어폰, 맛있는 과자 간식까지 지급받고 해설자인 맹문재(안양대학교 교수) 시인을 따라나섰다. 

 

 

제일 처음 찾은 곳은 광화문 교보 뒤에 있는 시인의 옛 집터였다.
이 집터는 처가 집터로 부인 이정숙 여사와 살면서 창작활동을 했으며 인이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광화문 앞 대로변에 위치한 중심가에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처갓집이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박인환 시인에 대해서는 ‘목마와 숙녀’라는 시 이외에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우리가 몰랐던, 또는 잘못 알고 있었던 박인환 시인에 대해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지만 

분명하고 힘 있는 해설을 해준 맹문재 시인의 열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시인 중에 왜 하필이면 박인환 시인에게 끌렸을까?
 10년간 박인환 시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온 맹문재 시인은 2008년 <박인환 전집> 까지 실천 문학사에서 간행했다고 한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자꾸만 박인환 시인과 맹문재 시인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박인환 시인 소개 및 연보

 

 
(출처 : 강원도 인제군 박인환 문학관 )

 

박인환 시인은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11세 서울로 이사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거주하다 원서동으로 이사하면서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 14세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업보다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한다.
16세에 자퇴를 하고 한성중학교를 거처 아버지의 친지가 있는 황해도 재령 명성중학교 졸업


1944년 19세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1945년 20세 광복 후 서울로 상경 아버지를 설득하여 3만 원을 얻고,

작은 이모에게 2만 원을 얻어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마리서사’란 서점을 개업했다.


1948년 22세 마리서사를 폐업하고 마리서사를 드나들던 문학소녀 이정숙 여사와 결혼 후 세종로 135번지 처가에서 거주한다.

자유 신문 문화부 기자로 취직


1949년 24세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경향신문 입사 동인 “후반기” 결성


1950년 25세 한국 전쟁 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 12.8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종군기자로 활동


1952년 27세 경향신문 퇴사 후 주간국제 편집장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평론 게재


1953년 28세 7월 휴전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 ‘영화평론가 협회’ 발족


1955년 30세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여행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  선시집 <산호장>발간


1956년 31세 ‘이상추모의 밤’이 열린 이후 3일 연이은 폭음으로 3.17일 자택에서 사망


준수한 외모와 댄디한 신사로 주목받았던 박인한 시인의 너무도 짧은 삶이었다.

 


책방 마리서사 터를 찾아서
 

(종로 3가 낙원동 입구 서점 마리서사 터)


광화문을 지나 인사동으로 파고다 공원을 지나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지금은 보청기와 주얼리 가게가 들어서 있는 곳이 책방 마리서사가 있던 곳이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온 박인환 시인은 아버지를 졸라 3만 원을 얻고 이모에게 2만 원을 얻어 마리서사란 서점을 열었다.

지금도 번화가지만 그 당시는 훨씬 더 번화가였을 목 좋은 곳에

당시로써는 아주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서점으로 많은 문인들이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서점을 차린 이유도 책을 좋아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김수영 시인이 “인환이가 제일 기분을 낸 때가 그때였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있을 동안에도

나는 그 책방을 빼놓고는 그의 시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할 만큼 마리서사는 큰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고 한다.
 

그러나 20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책방에서 수입보다 지출이 많고 드나드는 사람들은 책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문학청년들이 모여 해방기의 모더니즘 시 운동을 낳는 아지트 역할을 하다 보니 곧 폐업하고 만다.
 

부인 이정숙 여사도 마리서사를 자주 드나들던 문학소녀였다고 한다.
서점을 폐업하면서 박인환 시인은 비록 서점은 망했지만 이곳으로 인해 부인이라는 보석을 얻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보청기 가게 앞에 마리서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안내판이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쓰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잠깐 멈추어 서서 ‘목마와 숙녀’나 ‘세월이 가면’ 시를 기억할 수 있게 말이다.

 


마리서사 터를 지나 맹문재 시인은 우리들을 운현궁으로 이끌었다. 
운현궁 행랑채에 옹기종이 모여 앉아 맹문재 시인의 차분한 해설을 들었다.

 


맹문재 시인에 따르면 박인환 시인이 1956.3월 31살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남긴 작품 수는

시 83편, 산문 76편, 번역 시 1편, 서간 13편, 번역소설 6편, 총 179편이다.
한국전쟁 등 상황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박인환 시인이 문단에 나온 1946년부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시 13편과 산문 13편, 총 26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모더니즘을 지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박인환의 작품 자체는 모더니즘의 경향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해방기의 혼란한 상황을 새로운 시 형식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적극적으로 담아냈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가 모더니즘 시라든가 사회참여 의식이 없다고 평가되어온 것은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1950년대 그 어떤 시인보다도 현실 인식이 강했던 시인이었다.


한국전쟁 (1950.6-1953.7) 기간에 산문 15편과 시 9편 총 24편을 발표했다.
육군 소속 종군 작가단에 소속되어 전쟁의 상황을 경향신문과 공군 정훈부에서 발간한 ‘창궁’을 통해 전쟁의 상황을 알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전쟁은 박인환 시인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주었다.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은 물론 친구들을 잃었다.
농부의 아들과 같이 선량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상실감과 허무함, 전쟁의 폭력성을 노래하면서 고발했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박인환 시인은 모더니즘으로 규정되어 있다.
정답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 평가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박인환의 시 세계를 모더니즘으로 국한 시킨 것은 그의 시 본령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현실참여 인식이 없는 명동의 댄디보이로 여기지게 된 것이다.
박인환 시인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으로 분리하거나 가둘 수 없는 그 이상의 시 세계를 성취했다.

 


(박인환 시인의 종로구 원서동 134번지 집터)

 

다음 탐방은 박인환 시인이 인제에서 올라와 덕수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살았던 원서동 집터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던 집이 그대로 있었는데 어느새 모두 허물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집터 앞에서 맹문재 시인의 제안으로 ‘목마와 숙녀’ 시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인 중에 시 낭독을 가장 잘한다는 윤일규 시인이 낭독하는 ‘목마와 숙녀’를 감상할 수 있었다.

중후한 목소리에서 풍겨 나오는 연륜과 비가 내리는 날씨까지 감성이 촉촉하게 젖어 왔다.
더구나 박인환 시인에 대한 자세한 해설까지 듣고 난 후여서일까?
 시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목마와 숙녀를 낭독하는 윤일규 시인 )

 

원서동 집터 앞에서 공식 문학 기행은 모두 끝이 났다.

문학 기행에 참여하는 이유는 각기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50+세대에게는 옛 기억의 소환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세월이 가면 모든 게 변하고 사라지고 잊히지만 기억 하나, 시 한 구절쯤은 품고 살고 싶은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낙원동 입구 거리에 서면 마리서사를 생각해 낼 것이고 친구이자 라이벌 김수영과 박인환 시인을 떠올릴 것이다.
잠시 멈춰 서서 ‘목마와 숙녀’ 그리고 ‘세월이 가면’ 시 구절 하나는 생각해 낼 것이다.

광화문 근처를 걷게 되며 교보 뒤 집터를 기억해 낼 것이고

우산을 쓰고 길게 걸어가던 문학 기행 행렬과 맹문재 시인의 열정적인 해설을 기억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