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산 아래쪽으로 보이는 운해가 이 산이 얼마나 높은 산인지를 보여준다
지리산은 우리나라의 남쪽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산 전체 면적도 엄청 넓어서 3개도(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에 걸쳐 있고, 행정구역으로는 5개의 기초자치단체(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일부를 포함해 있다. 수많은 봉우리 중 주요한 세 봉우리가 있는데, 동쪽에 노고단, 서쪽에 천왕봉, 그리고 중간에 바래봉이 있으며 그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왕봉이다. 천왕봉은 그 높이가 1915미터나 된다.
화대종주의 출발점이자 종점인 화엄사 화대종주의 또 다른 출발점이자 종점인 대원사의 석등
이 산을 등산하는 사람들은 산의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완주해본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호사가들은 그 출발점과 도착점이 어디인가에 따른 구분을 짓기도 한다. 이를테면 서쪽의 출발점을 구 인월로, 동쪽의 도착점을 덕산교로 하는(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태극종주 같은 것이 그것이다. 흔히 지리산 종주라고 하면 구례의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산청의 대원사까지 가는 ‘화대종주’가 일반적이지만, 요즈음에는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을 거쳐 노고단까지의 산행을 종주라고 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지리산 화엄사의 보제루
등산로도 여기저기 많이 열려 있어서 그 전체가 199킬로미터인데, 이 거리는 우리나라의 전통 리수로 계산하면 거의 500리나 된다. 그 등산로 전체를 한길로 죽 연결해 놓는다면 장정 걸음으로도 닷새 이상 걸어야 할 거리다. 이처럼 넓기도 하고 높기도 한 산인 것이다. 이 산을 등산하여 종주(위에서 언급한 화대종주 등)하려면 산 속에서 보통 이틀 밤을 지내야 할 정도이니 우리나라에서 이 산만큼 오래도록 머무를 수 있는 산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지리산 뱀사골 계곡.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도 지리산 주 능선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등산객들이 이 산을 사랑하여 오르고 또 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산에 몇 번 올랐는지를 자랑거리로 여기기도 한다. 그것은 이 산이 자신을 찾는 사람을 모두 품어주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부분인 한국전쟁 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산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단지 산이 깊어서가 아니라, 이 산이 갖고 있던 포용력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 산자락에 백두대간의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흰 눈이 내리는 날,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향하여 오르는 등산객들
지리산 등산로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출렁다리
이 산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데 대표적인 이름이 바로 지리와 두류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무르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설이 있어서 지리(智異)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또 다르게는 백두대간의 맥에서 흘러내려왔다고 하여 두류(頭流)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을 신령한 산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사찰이나 무속적 시설들을 세워놓고 이 산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띈다.
지리산 바래봉의 철쭉 군락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오늘날 지리산은 우리나라의 첫 번째 국립공원으로서 주요 등산로에 7개의 대피소 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피소는 철저한 예약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고, 예약 없이 산에서 경야할 수 없으며 비박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 휴식년에 들어간 봉우리와 골짜기도 있고, 국립공원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만 오를 수 있는 등산로도 있는 등 기관의 권위에 의해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배낭 메고 훌쩍 떠나는 산행은 꿈도 꿀 수 없으며, 산 자체가 험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등산 자체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지리산 둘레길의 일부. 이 구간은 걷기 수월하도록 잘 꾸며져 있는 구간이다
그 대안이 될 수도 있게 지리산 둘레길이 생겼다. 새 천년이 된 첫 십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갑자기 길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어쩌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 영향으로 사람들이 걷기 길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왜 우리나라에는 산티아고 같은 그런 길이 없을까를 생각해본 것 같다. 그래서 여기저기 걷기 좋은 길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리산 둘레길 같은 장거리 걷기 길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 길이 만들어지자 지리산같이 높고 험한 산에 오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 받았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밖에서 사랑하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빙 돌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의 또 다른 일부. 어떤 구간은 등산로만큼 험한 곳도 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순환형 길이기 때문에 어디가 시작점이라고 말하기 곤란하다. 그냥 걷는 사람이 걸어서 출발하는 그 곳이 바로 시작점이다. 그러니까 지리산 둘레길은, 산티아고 길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점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 것을 시작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꼭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공식은 없다. 그래서 이 길이 처음 시작될 즈음에는 1구간 2구간 하는 이름을 붙였지만 지금은 각 구간에 지명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인월-금계 구간이라든지 동강-수철 구간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남원 실상사의 한 전각.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유명한 사찰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맨 처음에 남원의 인월에서 둘레길 조성이 시작되어서인지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출발하려는 마음이 강한 것 같다. 인월은 지리적으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지역에 있어서 이 둘레길이 처음 시작될 때 중심지로 작용했다. 어쨌든 이 둘레길은, 지리산 자체가 그러하듯이 3개도, 5개의 시군이 포함되었으며 21개 읍면, 120여개의 마을을 잇는 총 295킬로미터의 장거리 걷기 길이다. 시계방향으로 걷는다면 남원의 인월에서 함양으로, 그곳에서 산청으로, 그리고 하동과 구례를 거쳐 다시 남원으로 돌아오는 길이며 큰 그림으로 보면 지리산을 빙 둘러싼 길이 된 것이다.
남원 실상사의 철불
오늘날은 빠른 속도의 시대다. 사람들에게 보통빠르기(Moderato)는 더 이상 보통빠르기가 아니라 느린 속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이 빠름의 시대에 과감히 안단테(Andante)로 걸어보는 느린 속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빨리 가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느리게 갈 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리게 감으로써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찰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걷기를 통하여 자기 수련을 하고 걸음 가운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걷기만큼 좋은 수련과 성찰의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지리산에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좋지만 지리산 밖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걸어볼 것을 감히 추천한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부부. 밝은 부분을 향하여 걸어가는 모습이 미래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리산을 종주 하려면 대피소 예약이 필수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누리집에서 예약할 수 있으나 경쟁이 치열하므로 예약에 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한 후 하는 것이 좋다. 초심자는 꼭 경험이 많은 안내자와 함께 철저한 준비를 한 후 등산하는 것이 좋다. 화엄사나 노고단 방면에서 오르려면 전라선 열차(무궁화호)를 이용하여 구례구역에서 내려 성삼재행 버스를 이용한다. 중산리 방면에서 오르려면 남부터미널에서 원지행 버스를 이용한다. 백무동 방면에서 오르려면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행 버스를 이용한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될 만한 나무들이 이 길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둘레길을 걸으려면 지리산둘레길 누리집을 통해 걷고자 하는 구간의 정보를 파악한 후 그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인월 구간을 걸으려면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행 버스를 이용하여 인월터미널에서 내려 안내소를 찾으면 된다. 숙박은 마을마다 있는 민박을 이용하되, 누리집을 통해 미리 정보를 파악하여 예약한 후 이용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