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년기자들의 페이지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
꿈은 깨지고 40년 우정은 남다
대학 2학년 때인 12월 24일 오후 5시 무렵,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는 맥스웰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커피숍에서 남녀 학생 10명 정도가 자리를 함께했다. 같은 과 남자친구 대여섯 명이 오래전부터 각자의 재주와 인맥을 총동원해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의 미팅을 주선해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지내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필자도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봤으나 단순한 미팅이 아니라 밤새 함께 지내는 조건이다 보니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겠다고 다짐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 친척 여동생의 협조 하에 필요한 비용은 남학생이 전부 부담하고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으면 중도에 돌아가도록 보장하겠다는 조건에 어렵사리 겨우 미팅을 성사시켰다. 결과적으로 필자가 주선한 모양이 되어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낼 음식점도 앞장서서 예약하게 됐다. 신경 쓸 일이 많아 은근히 필자가 주선한 것이 후회되었지만 어찌어찌하여 어려운 일은 다 해결하고 함께 만나 예약 장소로 옮겨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약속시간이 한 시간 이상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30분 이상이 더 지체되자 여학생들이 술렁이더니 자기들끼리 실랑이를 벌였다. 일부가 그만 가겠다고 나가버리자 나머지도 그냥 따라서 나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끼리 허탈하게 앉아서 아직 오지 않는 친구 욕도 하면서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2시간 이상이 지난 7시가 넘어서야 마침내 그 친구가 씩 웃으며 “어~ 일이 있어 좀 늦었어, 미안해들! 그런데 여자들은 어디 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눙치면서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필자는 너무 화가 나서 왜 늦었는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대뜸 그 친구에게 “야! 이 새끼야! 너는 전화할 줄도 모르냐? 개 상놈의 새끼!”라고 거친 욕을 퍼부어주었다. 필자가 욕을 하자 그 친구도 화를 내며 “야! 네가 뭔데 나에게 쌍욕을 해?” 하며 대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결국 그날 밤 눈 내리는 소공동 길 위에서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졌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이 결사적으로 말려 싸움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석관동 들판에서 다시 만나 결투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약속한 날 오후, 석관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함께 만나 널찍한 장소를 찾아가 심판도 없이 둘이서 맞짱을 떴다. 한 10여 분쯤 싸웠을까. 쉬는 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 둘 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그만 싸우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그 후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 때 만나 서로 악수만 했고 한참 동안은 서먹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차츰 가까워졌고 함께 시험 준비도 하고, 수업이 없는 자투리 시간에는 탁구와 당구도 치고, 음악 감상도 함께하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사회에 나온 후에도 서로의 조경사를 챙겨주며 가끔 연락해 만난다.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우리들의 우정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악연이 오히려 수십 년 지기 절친한 친구의 인연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록 성사는 안됐지만, 그런 미팅을 내 남은 생애에 언제 또다시 주선해볼 수 있을까? 지나간 추억은 대부분 아름다운 것 같다.
김종대 동년기자
미제 사탕 ‘참스’와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연말연시에 할 일도 많고 바빠지겠지만, 크리스마스 생각을 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에 가슴이 촉촉해지고 그리운 마음이 차오른다.
필자는 딸만 셋인 집의 맏딸이다. 아버지는 딸 셋을 큰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그런데 집안의 장남으로 딸만 두었다는 게 좀 문제가 되기도 했나보다. 당시만 해도 남아 선호사상이 만연했을 때라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설움을 톡톡히 받으셨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아버지에게 양자로 주겠다는 제의까지 할 정도로 엄마에게 아들 없는 압박이 심했는데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고 딸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엄마를 보호해주셨다. 그래서 사촌 동생이 필자의 친동생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 딸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려고 노력하셨다. 낭만적인 성격의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어릴 때부터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예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 딱히 종교가 있으신 건 아니었지만 어린 세 딸의 손을 잡고 시내 교회로 종소리 들으러 가는 걸 즐기셨으며 동화책도 많이 읽어주셨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크리스마스에는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산타 할아버지가 오셔서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도 그땐 얼마나 근사했는지 착한 아이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필자가 대여섯 살 되었을 무렵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아버지는 산타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걸어둔 양말 속에 선물을 주고 가신다며 양말을 걸어놓으라고 창문에 길게 줄을 매달아주셨다. 두 살 터울이었던 두 동생보다 더 큰 선물을 받겠다며 아버지의 큰 양말을 찾았지만, 필자가 원하는 선물이 들어갈 만한 양말은 없었다. 동생들은 양말을 걸었지만, 필자는 엄마의 흰 버선을 빨래집게로 집어 걸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크게 웃으시며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욕심 부린 마음을 꾸짖지 않고 웃음으로 대해준 아버지의 환한 모습이 무척 그립다.
크리스마스 날, 필자는 잠에서 깨어 줄에 매단 버선부터 확인했다. 그 속에는 12가지 색 크레용이 들어 있었다. 뛸 듯이 기뻐했던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쉽게도 그다음 해부터는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줄 선물을 몰래 감춰놓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른 척 동생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즐겼다. 선물은 다양했고 양말에 넣을 수 없는 선물은 머리맡에 두셨는데 맛있는 과자와 사탕 통이었다.
당시에는 미제 물건들이 많았다. 초콜릿과 ‘참스’라는 미제 사탕은 우리가 정말 좋아하던 선물이었다. ‘참스’ 캔디는 둥근 통 위쪽 알루미늄 뚜껑을 고리를 잡아당겨 열게 되어 있었다.
고리를 잡아당기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사탕 향기가 퍼져 나왔다. 미제 사탕이 없어질 무렵 해태제과에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었다. 디자인도 똑같고 뚜껑 여는 방식도 같았지만 ‘치익’ 하며 퍼지던 달콤한 향도 없었고 맛도 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꼭 사탕 맛이 달랐다기보다는 아버지가 사주시던 추억의 사탕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꼈다는 생각이 든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에게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카드가 많이 왔다. 모양도 다양하고 그림도 멋졌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며 동화처럼 예쁜 세상을 상상했고 환상적인 미래를 꿈꾸며 자랐다. 우리 자매들에게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치셨던 아버지는 5년 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필자도 이제는 손녀 손자의 선물을 고르는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와의 예쁜 추억처럼 손녀 손자에게도 필자가 훗날 그리움의 존재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따뜻한 희망을 품어본다.
박혜경 동년기자
아이들의 마지막 산타클로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딸 둘을 키웠는데 3년 터울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으로 자라게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엔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끼리도 서로 선물을 나누며 감사와 사랑을 확인하곤 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인디언 핑크 스웨이드 천을 잘라서 손바느질로 고리가 달린 버선을 두 개 만들었다. 버선엔 각자의 이름을 흰 실로 수놓고 테두리 마감 스테치도 한 땀 한 땀 공을 들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한 달 전쯤부터 이층 침대에 걸어두었다.
아이들이 서로 다투거나 양보나 배려가 부족할 때는 크리스마스에 올 산타할아버지를 불러내 긴장을 시키곤 했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해마다 필자가 몰래 넣어주는 선물을 기다렸다.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아이들은 평소 갖고 싶은 물건 이름을 적어서 버선 속에 넣으면 산타할아버지가 보시고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기대에 가득 차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필자는 아이들 몰래 메모지를 꺼내 보곤 혼자 나가서 선물을 사고 포장도 했다. 그리곤 커다란 장바구니에 숨겨 집으로 돌아온 후 살짝 안방 장롱에 숨겼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엔 기대에 들떠 잠도 자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자다가도 부스럭 소리만 나면 혹시 산타할아버지가 오셨나 하고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날 늦게 귀가한 남편이 현관 벨을 누르자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아이들이 비어 있는 버선 속을 보며 거의 울상이 되어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이 착하지 않아 선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 남편이 기발한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이미 일어났으니 선물을 넣을 기회는 놓쳤고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남편은 버선 속에 몰래 메모지를 넣었다. 아빠가 썼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왼손으로 쓴 글씨의 메모지였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할아버지다. 거실 두 번째 서랍장을 보아라.’
아이들은 울다가 깜짝 놀랐다. 흥분한 아이들은 거실로 도토리처럼 굴러갔다.
‘흐음, 잘 찾았구나! 착한 아이들아.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아라.’
아이들은 피아노 뚜껑을 열려고 또 뛰었다.
‘이것도 잘 찾았구나! 이번엔 세탁기를 열어보아라.’
아이들은 다용도실로 뛰었다. 그리곤 환성을 터뜨렸다. 세탁기 속에 예쁘게 포장된 선물 보따리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물을 다소곳이 들고 거실로 돌아온 아이들 얼굴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음 날 학교와 유치원에서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커다란 비밀이라도 알게 된 듯 울먹이며 내게 안겼다.
“엄마, 아이들이 그러는데 산타할아버지는 없대요. 맞아요?”
지난 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던 행복했던 순간을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모두 그런 할아버지는 없다고 해서 자기만 있다고 우겼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한 필자는 고민하다가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한동안 절망하며 슬퍼했다.
그 후로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누던 따스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용돈을 모아 조몰락거리며 서로의 선물을 준비했다. 서로에게 산타가 되어준 것이다. 그렇게 동화 속 마지막 산타할아버지는 떠났지만 그 아름다웠던 크리스마스이브는 영원히 아이들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경숙 동년기자
아내의 미소 그리고 평생 기억하고 싶은 크리스마스
사람은 언제 행복함을 느낄까? 행복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필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처음 경험한 것은 결혼하고 약 8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아내가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다음 해인 1989년 필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영세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세는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함을 받는 것이다. 필자는 이날 큰 은총을 받았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허물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더욱이 아내와 함께 종교를 갖게 되어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로서 영세 이후의 대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해졌고 소통도 잘됐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장남과 8남매의 막내딸이었던 필자와 아내는 가정문제로 대화를 하면 항상 평행선을 달리며 입장 차이를 쉽게 좁히지 못했다. 그러던 우리 부부가 신앙생활을 한 뒤로 평행선이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그보다도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주일마다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외식을 하는 생활이 우리 가정에 새로운 문화를 가능하게 해준 전기가 되었기에 더욱 행복한 크리스마스로 기억되는 것 같다.
또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영세를 받았기에 필자도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필자의 생활은 이런저런 혼돈의 블랙홀 속에 빠져 있었다. 경제적,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풍조 속에서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종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물질적 충족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때 비로소 평화롭고 충만해짐을 알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989년 크리스마스가 유난히 행복한 날로 기억되는 것은 영세라는 축복 말고도 필자의 삶에서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아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들 둘을 낳고 나서 몹시 지쳐 있던 아내는 성당을 다니면서부터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당시 필자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심각한 가정의 위기까지 느꼈다. 결혼 후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 휴일도 없이 장남의 맏며느리로서 오랫동안 강행군을 해왔던 아내였기에 그 고충이 십분 이해됐다. 미안한 마음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일찍 퇴근해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내가 자신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당에 다니도록 했는데 그 후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신이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아내의 미소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레지오 활동, 성지순례 등이 있는 날이면 필자가 두 아들을 돌봤다. 아내의 활동이 많아질수록 필자의 자유로운 생활이 제약받았지만 그래도 아내의 미소를 보면 행복했다.
두 번째는 영세를 받는 날 필자가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철천지원수 같은 직장 동료를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념과 종교적 신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의 신념은 강한 것 같아도 어느 한순간에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순교자처럼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영세를 받는 날, 하느님에게 원수와 같던 동료를 용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동료가 회의 때나 모임에서 필자를 향해 공격을 해도 대응을 안 했고 그를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리고 동료의 장점을 생각해보려 애쓰고 동료가 없는 곳에서 칭찬을 시작했더니 어느 날부터 행동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한 사람을 다시 얻게 되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행했더니 은총을 또 내려주신 것이다. 1989년 크리스마스는 이래저래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신용재 동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