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주변에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수용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불필요한 물건과 관계를 줄임으로써 긍정의 행복감을 충전할 수 있고, 물건이 줄어들면 유지나 정리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장점을 들어 서로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실천하기도 한다.
과연 인간이 가지는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소유 욕망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이성적이지 못할뿐더러 때로는 충동으로 치달아 예상치 못한 행동을 초래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눈독 들일 때가 아름다운 법이다. 강영숙의 소설 ≪청색모래≫에 나오는 ‘그녀’처럼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영혼을 유혹하는 그 무엇 앞에 서면 이성은 마비되기 마련이다. 영혼이라도 팔아서 기어이 물건을 사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비웃음을 합친 음산하고, 불쾌하고, 뻔뻔스러운 웃음소리로 비아냥거린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박증이 되어버리면 소설속의 주인공들처럼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강영숙 소설집 『흔들리다』 수록된 단편소설 ≪청색모래≫, 문학동네 (2002)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이 소설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그녀’와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가짜일지언정 롤렉스시계에 집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의 직업이 말해주듯이 실용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다소 속물스러운 인간이다. 그녀를 만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아도 여성을 선택하는 기준 또한 세속적이다.
결혼을 미뤄오길 잘했다 싶을 만큼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붕어 모양의 눈을 내리뜨고 묻는 말에 대답만 했다. 신중하고 다소곳해 보인다는 게 장점이었다. 일은 물론 경제력과 술 실력에서도 남자를 능가하는 여자들한테 물린 탓인지 그 수동성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난 공무원이었으므로 괜찮은 결혼을 해야 했다.
- P. 82
흥미로운 점은 여자가 가진 소비 취향이다. 남자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비실용적이라는 점이다. 와인보다는 와인 잔에 관심이 많고, 남자가 보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놋 덩어리 같은 앤틱 램프와 세월에 녹이 슨 골동품들에 집착을 한다. 남자는 여자의 과도한 비실용적 소비를 참지 못해 가학적인 폭력을 일삼지만 여자는 이를 피학적인 자세와 섹스로 받아 넘긴다.
그녀는 와인잔을 들고 앉아 아름답지 않느냐고, 황홀하지 않느냐고 자꾸 물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거실의 그 골동품 램프들 밑에서 벌인 정사 내내 뱃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램프가 머리 위로 떨어질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행복해서 죽을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P. 86
그녀의 소외는 끝없이 이어지는 소비 행위로 드러난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어쩌면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그녀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물건 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소비는 소통으로 보인다. 그녀는 주말이면 인사동이며 황학동 벼룩시장을 가자고 남자를 조른다. 주로 골동품 난전을 뒤져 오래되고 낡아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을 사들인다. 물건들 중에서도 그녀가 더 집착하는 것은 인형이다. 결혼 전에도 두 자루나 되는 갖가지 형태의 인형을 사 모았고, 그 후에도 인형 모으기는 멈추지 않는다. 인형은 그녀 자신일 수도 있고 인형이 그녀일 수도 있다.
황학동 벼룩시장 <이미지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sinbiphone/6850204871>
저기여 마지막으로, 닥터지바고와 라라가 설원 속에서 마주 보고 서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인형이 있거든요. 둥그런 유리 안은 온통 흰 눈이구요. 지바고의 손에는 끝이 날카로운 펜이 들려 있어요. (중략) 어디에도 없다구요. 마지막으로 그거 하나마 더 사면 안 될까요? 그거 하나만 딱……. 그 즉시 침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노 코멘트.
-P. 95
남자는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롤렉스 유사품에 집착한다. 친구에게 빼앗다시피 한 시계를 손목에 차고 소개팅을 간다. 언젠가는 오리지널 제품 넘버가 찍힌 롤렉스를 갖겠다는 의지를 굳게 가지고 그녀를 만난다. 남자는 진품을 향한 갈망과 그것을 소유할 수 없는 현실에서의 결핍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남자의 가짜시계는 수시로 멈춰 버린다. 친구가 시계를 주면서 한 말을 잊은 것이다.
그 시계는 손목에 차고 몸을 움직여야 가. 움직이지 않고 그냥 두면 멈춰버려. 그러면 다시 태엽을 감아 시간을 맞춰야 해.
-P. 82
남자는 여자의 비정상적인 소비를 멈추게 하려고 장기휴가를 얻어 ‘그녀를 자극할 아무런 표지도, 이미지도 없는 어떤 무균질의 장소’인 ‘사구(砂丘)’로 치유여행을 떠난다. 소설은 명확한 서사를 가진 전반부와 다소 몽환적인 후반부로 쌍을 이룬다. 마치 두 주인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 짝을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유사품 롤렉스시계는 사막에 도착하자 제멋대로 느려지다가 끝내 멈춘다. 사막은 시간이 멈춰버린 세계이다. 시간에 집착하는 남자는 사막에서 그 고리를 끊어 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막에서도 그는 동네 골프장을 그리워하고,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뭘 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소비욕구가 그녀의 질병이듯이, 시계에 대한 집착으로 열등감과 상승 욕구는 남자가 치유해야 할 질병이다.
어느 밤이나, 밤새 바람이 불었다. 나는 자다가 문득문득 한기가 들어 잠에서 깨어났고 그럴 때마다 새근새근 숨 쉬며 자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더 이상 탕진할 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01
소설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 ‘16세기 러시아의 이콘화’를 산 여자가 사지가 절단된 채로 박제처럼 벽면에 매달려 있는 기괴한 장면으로 끝난다. 실재하는 공간(인사동, 황학동 벼룩시장)과 실재하지 않은 공간(사막)이 나란히 대비가 되면서 소설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스트리밍'처럼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우리들에게 소유는 구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여러 분야에서 공유 개념이 생겨나면서 굳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시대라고도 사람들은 말한다. 설문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78%가 소유보다는 경험을 원한다는 보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그런 변화에 의심이 들었다. 나의 경우에는 책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날마다 소유의 갈증에 시달린다. 유혹은 참으로 은근하고 끈질긴 것이어서 나로서는 거부하기 힘들다. 단언컨대 현대사회에서 소유와 소비의 유혹을 이성으로 통제하고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지금도 헌책방을 기웃거리며 그녀의 묵직한 자루에 담긴 인형처럼, 오래된 책을 가방 가득 담아 짊어지고 나온다. ‘저 책을 다 어찌할꼬.’ 소설 속 그녀가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찰 것만 같다. 논리나 세속적인 잣대로 내밀한 심리를 다스릴 수 있다면, 그건 그 세계를 너무 쉽게 보는 것이 아닐까. 욕망이란 그토록 지독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 강영숙 소설집 『흔들리다』 수록된 단편소설 ≪청색모래≫, 문학동네(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