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쓰겠노라 이야기해 놓고, 막막하기도 하고 온갖 잡생각이 올라와 복잡하기도 했어요.

편지 형식을 빌려 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아버지와의 추억 그리고 그 추억이 내게 미친 영향이 뭔지 들여다보고 싶었죠.

모든 글쓰기는 결국 자기 이야기일수 밖엔 없으니까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막막했죠.

이런저런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먹먹하기도 하고 슬프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어요

 

오늘 아침 페이스북에 뜬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영감이 떠올랐어요.

뮤즈의 신이 온 거죠.

 

사진은 1983년에 찍은 서울 풍경을 담고 있었어요.

여의도였어요.

개인택시 운전면허증을 교부받은 택시운전사들이 마치 군대 사열병처럼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장면이에요.

사진 한 장이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장소며 사람이며 풍경이, 저의 개인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보여주고 있네요

 

<1983년 여의도. 개인택시 면허를 발급받은 기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다. 당시의 군사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누가, 왜 찍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사였죠.

개인택시 면허를 따는 게 꿈이셨어요.

꿈은 이뤄지지 못했죠.

그 꿈이 이뤄졌다면, 아버지도 사진 속 어딘가에 계셨을 거예요.

그랬다면, 이후 우리 가족과 제 삶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봐요.

 

아버지가 개인택시 면허를 따지 못한 까닭을 저는 알고 있어요.

서슬 퍼런 박정희 시대에 아버지는 택시기사 노동조합 운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이 회사 저 회사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 아버지에게 개인택시 면허는 그림의 떡이었을 거예요.

이룰 수 없는 꿈이었겠죠

 

구로동 살 때였어요. 아마 제가 중학생 때였을 거예요.

아버지가 한자를 흰 종이에 쓰며 익히고 계신 걸 여러 번 봤죠.

그땐 왜 그렇게 한자를 쓰고 배우셨는지 몰랐어요.

나중에 제가 대학 들어가 사회 현실에 눈을 뜨면서 알게 되었죠.

그 놈의 노동법 때문이었어요.

 

아버지 책상 앞엔 노동관계 기본법과 각종 법령이 담긴 제법 두툼한 책이 한 권 있었죠.

온통 한자로만 쓰여진 그 책을 읽어 내려면 한자를 아는 게 필수였을 거예요.

아버지에게 한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무기였던 거죠.

전태일은 자신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아버지는 대학생 친구를 찾는 대신 독학을 선택한 거죠

 

식민지 시절 태어나 한국전쟁과 산업화 시대를 통과한 아버지의 삶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먹먹할 때가 많아요.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에게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란 사치였을 거예요.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아버지는 고아가 되었잖아요.

워낙 늦둥이로 태어났기에, 아버지의 어머니와 아버지 - 제겐 할머니와 할아버지 - 가 일찍 돌아가신 거잖아요.

그 뒤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누이들 - 제겐 고모들 -의 손에 컸구요.

누이 집에 얹혀살던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싶어요.

제 어릴 적, 아버지가 살던 충남 공주에 가면 가끔 아버지 어릴 때 이야기를 듣곤 했죠. 동네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다고.

왜 아니었겠어요. 부모 없는 아이가 시골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아버지는 십대 후반 공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오셨죠.

이십 대의 끝 무렵 어머니를 만나 저를 얻으셨어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이십대는 어땠을까 궁금해지네요. 거기에 대해 듣지 못한 게 아쉬워요.

암튼, 아버지가 가정을 꾸려 생계를 이어가야 했을 때, 대한민국은 산업화 드라이브가 한창이었죠.

그 바탕엔 군사문화가 도사리고 있었고요. 오늘 아침 조우한 사진은 그걸 잘 보여주고 있어요.

택시의 도열이 군대의 도열과 똑 닮아 있잖아요.

 

군사문화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요즘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미투운동의 배경엔 군사문화가 도사리고 있죠.

상하 권력의 위계가 분명하고 지배/통제와 복종/순응만이 관계의 모든 것인 군사문화에서 성폭력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듯해요.

남자와 여자를 마치 군대의 상사와 부하처럼 여기는 문화는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어요.

 

이 모든 게 청산되면서, 상호 존중과 배려의 사회로 가는 데엔 시간이 걸리겠죠.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야할 길이죠. 제가 보고 싶은 세상이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은 생은 그런 세상을 만드는 길에 함께하고 싶어요

 

군사문화와 관련해 짚어야 것은 분단체제예요.

아버지가 어렸을 땐, 남과 북의 개념조차 없었겠죠. 충청도와 경상도를 오가듯 황해도와 함경도를 원하기만 하면 자유롭게 오가셨을 테죠.

아버지가 청년시절 겪으셨을 전쟁과 분단은 남북 모두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어요.

이북의 빨갱이는 악의 근원이고, 그들을 때려잡을 수만 있다면 군사적 통제와 불편함은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이제 며칠 뒤면 그 빨갱이의 수괴와 남한의 대통령이 한 자리에 앉아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눈다고 해요.

아버지 살아계셨을 땐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통일까진 바라지 않아요.

이번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에서 적극적인 교류가 일어나길 바랄 뿐이어요.

북미 회담을 경유하면서 휴전이 종전으로 이어지길 바라요.

한반도에 핵무기는 사라지고, 동북아에 항구적 평화체제가 만들어지길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 세상이 오면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아요. 제가 파주에 살잖아요.

저희 집에서 아침에 출발해 평양서 점심 먹고 놀다가 개성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집으로 오는 거예요.

철도나 고속버스 등 대중교통이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당분간 어렵다면 직접 운전을해 다녀와도 좋겠죠

 

그리고 또 있어요.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제겐 할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평산에 가보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겠죠.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할아버지는 1910년도 후반이나 1920년대 초반에 평산을 떠나 공주로 이동하셨어요.

100년 전에 그 땅을 떠났으니 할아버지의 흔적은 없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어릴 적 숨 쉬었던 공기를 맛보고 싶고 산천을 둘러보고 싶어요

 

제겐 딸이 하나 있어요.

딸이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었죠.

저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제 딸에겐 증조할아버지와 무척 많이 닮았다는 거였어요.

할아버지의 삶과 존재는 그저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제 딸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거죠.

할아버지의 고향 땅을 찾아가는 여정은 저와 제 자손들이 스스로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인 셈이죠.

그래서 궁극으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맥락을 살펴, 삶의 의미와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올해 말까지, 매달 한 번씩 아버지를 만나는 여정을 이어가려 합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 굽어 살펴주세요